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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5주년 특집]학력·재산·지역별 끼리끼리 인맥 ‘칸막이 사회’

사회

by 정소군 2011. 10. 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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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임원인 김모씨(46)는 지금도 고등학교 동창 5~6명과 만나 1년에 한두 번씩 부부동반 등산을 다닌다. 변호사·의사 친구부터 술집 주인, 아파트 단지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친구 등 면면은 다양하다. 김씨는 “솔직히 사회적 지위나 벌이의 차이가 아예 신경이 안 쓰인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고, 만나면 아내에게 이야기 못하는 것까지 허물없이 털어놓는 사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1980년이었다. 김씨는 “소풍 끝나고 밤늦도록 반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과 서울 한복판을 무리지어 몰려다니면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전교 1등과 꼴찌도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어울렸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풍경은 영화 <친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인맥은 레벨테스트를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학원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 자사고를 나온 서울대생 vs 일반고를 나온 지방대생

 

자립형 사립고 출신으로 올해 서울대에 입학한 김민호군(가명·19).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친구들과의 인연은 중3 때 다닌 목동의 ㄱ학원에서 출발한다. ‘자사고 및 특목고 준비반’으로 유명한 이 학원의 수업을 듣기 위해 전국 각지의 내로라하는 학생들이 방학마다 서울에 올라온다. 소수정예로 구성된 이 특별 고입준비반에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김군은 현재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ㄴ군과 이 학원에서 만났다. ㄴ군은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자사고 입시 준비를 위해 방학 때마다 이 학원 수업을 들으러 서울에 올라왔다. 학원에서 친해진 ㄴ군은 김군과 함께 자사고에 진학하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친한 고교 동창이자 서울대 입학동기가 됐다.

 

김군의 또 다른 친구인 ㄷ군 역시 ㄱ학원의 영재고 준비반 출신이다. ㄷ군은 영재고 준비반에 있었지만 방향을 틀어 김군과 함께 자사고에 입학했고, 역시 김군과 고교 동창이자 대학 동창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이러한 ‘끼리끼리’ 인맥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자사고나 특목고 학생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그룹 짓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에 동의했다. “고등학교 밴드부끼리 가끔 합동공연을 하거든요. 그런데 참가 학교를 보면 다 대원외고·한영외고·청심국제고·용인외고·민사고예요. 일부러 일반고를 배척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서로 아는 친구들이 거기서 거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결국 그렇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에게 가끔씩 연락하고 지내는 일반고 출신의 중학교 동창들도 있고, 일반고 출신의 같은 서울대 친구들도 있다. 그렇지만 김군은 그들과 이야기할 때 무언가 모를 벽이 느껴진다고 했다. “솔직히 그 친구들은 정치나 사회철학에 관심이 없어서 깊이 있는 대화에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토론식 수업도 많이 해봤거든요.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문제 아닐까요.”
 
부산의 일반고를 나와 부산에 있는 지방대를 다니고 있는 이민정씨(가명·22)의 친구들 대부분은 지방대나 전문대생이다. 서울에 있는 2년제 전문대에 진학해 현재 어린이집 교사로 취직한 친구 ㄱ씨는 고1 때 수준별 보충반에서 만나 친해졌다. 성적으로 반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준이 비슷한 친구들과 묶이게 됐다. 친구 ㄴ·ㄷ씨는 고3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친해진 사이다. 이들은 현재 이씨와 마찬가지로 부산에 있는 또 다른 지방대를 다니고 있다.

 

같은 반 친구 중에 포항공대나 카이스트에 진학한 아이들도 있지만, 그들과는 상대적으로 함께 공유한 추억이 많지 않다. “걔네들은 보충학습도 ‘SKY반’에서 따로 받았고, 야간자율학습도 공부 잘하는 애들만 들어갈 수 있는 별도의 정독실에서 따로 했어요. 공간이 분리되니까 자연스럽게 친구 그룹도 성적에 따라 나뉘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죠.”

 

‘SKY’대에 아는 친구 한 명 없는 지방대생마저 생겨난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저자이자 대학 강사인 엄기호씨는 지난 5월 한 교육 월간지에 기고한 ‘동시대인의 죽음’이란 글에서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사건에 대한 지방대생들의 생각을 분석한 바 있다.

 

그가 출강하고 있는 강원도의 한 지방대생은 “내 주변에는 카이스트는커녕 연·고대를 다니는 친구도 한 명 없다”며 “내가 이 사건과 엮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임씨는 “우리 사회의 계층화는 이미 거의 고착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에 따라 학교와 친구 관계도 어릴 때부터 이미 계층에 따라 분리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 요즘 초등학생들… 더욱 촘촘해지는 칸막이
 
칸막이 인간관계는 초등학교 때 조성된다. 서울 논현동에 사는 최성현군(가명·9)은 한 사립초등학교 3학년생이다. 최군에게는 5명의 친한 친구그룹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들이 먼저 친해진 후 서로의 자녀들을 묶어 함께 각종 방과후 과외활동을 시키면서 알게 된 사이다.

 

이 학교 부설 사립 유치원 출신이 아닌 최군은 1학년 1학기까지만 해도 아무런 그룹에 끼지 못했다. 그러나 최군이 시험을 볼 때마다 1~2등을 다툰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조금씩 생일파티 초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군의 아버지(46)는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고 여기저기 생일초대를 받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수준의 상위권 학생 학부모들로부터 함께 그룹활동을 시키자는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군을 포함한 6명의 아이는 토요일마다 부모들이 짜준 축구단 활동을 하고, 일요일에는 함께 과학 체험학습 활동을 한다. 또 전문강사를 따로 붙여 함께 그룹으로 수영레슨을 받는가 하면, 미술·음악 등 각종 특기 활동도 함께했다. 최씨는 “아이들이 같은 중학교에 올라가게 된다면 이 그룹을 계속 유지하면서 특목고나 자사고 준비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잠실 1단지에 사는 초등학교 3학년 박민주양(가명·9)의 경우도 비슷했다. 어머니 한모씨(39)는 “아이가 1학년 때 함께 교실청소를 해주면서 마음이 맞은 엄마 4명과 의기투합해 아이들을 같은 학원에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학년이 바뀌면서 반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단짝그룹의 결속력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반 친구들과는 친해지는 데 한계가 있고, 결국 방과후에 같이 어울리는 게 중요한데 이들과는 부모들 간에 왕래도 잦고 몇 년째 같은 학원코스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이나 잠실, 목동 지역은 학군이 좋고 인맥도 잘 형성돼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이사를 가지 않는다. 한씨는 “큰 이변이 없는 한 다들 단지 내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함께 진학할 것 같아서 이 모임은 계속 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어찌 보면 ‘고인 물’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아이들은 다들 안심할 수 있는 친구들이라 다행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서울 도봉구의 ㄹ초등학교 1학년 담임인 신모 교사는 “도봉구는 이사도 잦고 가정에 경제적 여유도 없어 ‘끼리끼리’ 현상이 강남이나 잠실만큼 심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학원에 갈 형편이 못돼 방과후 돌봄교실에 다니는 아이들은 그네들끼리 뭉치고,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은 또 그들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특목고·자사고를 중심으로 최상층 아이들은 바로 해외 대학에 진학하거나 국내 명문대에 입학하고, 페이스북이나 인터넷으로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며 “일찍부터 아이들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부모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의 교우관계 네트워크를 직접 만들어 주고 관리하는 경향이 많아지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1980년대 고교 평준화의 도입으로 그나마 조금씩 다양화되기 시작하던 친분관계가 다시 분리되고 있다”면서 “인맥의 단절 현상이 심해질수록 다른 계층 간의 소통이 부재하고 다양성이 없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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