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서방 정상 29년 만에 처음 쿠바 간 프랑스 올랑드

국제뉴스

by 정소군 2015. 5. 13. 15:39

본문

ㆍ“경제 봉쇄 해제 돕겠다” 피델 카스트로와도 만나


10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 국제공항에 도착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벅찬 감동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 이후 쿠바를 찾은 첫 서방 지도자가 됐다. 서구권 국가 정상이 쿠바를 직접 방문한 것은 1986년 펠리페 곤살레스 스페인 총리 이후 29년 만이기도 하다. 

올랑드 대통령은 11일 쿠바 아바나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쿠바의 발전을 가로막은 미국의 금수조치가 해제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면서 “쿠바 경제를 크게 망가뜨린 경제봉쇄가 궁극적으로 해제될 수 있도록 프랑스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쿠바 혁명의 주역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오른쪽)이 11일 수도 아바나 근교의 자택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아바나 | AP연합뉴스


미국은 지난해 12월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여행 및 송금 자유화 등 일부 금수조치를 해제했으나 아직까지 대부분의 경제제재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는 또 시내 호텔에서 열린 비즈니스포럼에 참석해 “프랑스는 쿠바 경제모델 고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면서 합류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쿠바 방문에 세계적인 석유업체인 토탈, 까르푸, 에어프랑스 등 대표적인 자국의 기업인들을 동행해 대대적인 ‘세일즈 외교’를 펼쳤다. 실제 토탈은 이날 쿠바 국영 석유업체인 쿠바페트롤레오와 함께 쿠바 근해 석유자원을 개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현지 국영방송이 전했다. 쿠바에는 70억배럴 이상의 석유가 매장돼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이날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회담을 한 뒤 함께 아바나 근교의 피델 카스트로 전 의장 자택을 찾아가 기후변화 등 국제 현안과 쿠바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등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는 동행한 기자에게 피델을 가리켜 “지금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고 말했다. 피델은 쇠약해 보이긴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데는 무리가 없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미국과 쿠바가 국교를 정상화한 후 일본, 러시아, 미국, 유럽연합(EU) 등 각국의 고위 공무원들이 앞다퉈 쿠바를 방문해왔다. 오는 9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쿠바를 찾기로 예정돼 있다. 그러나 쿠바를 찾은 ‘첫 번째 서구권 정상’은 프랑스의 몫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대통령의 쿠바 방문은 1898년 쿠바가 독립한 이래 117년 만에 처음이다.

쿠바의 정치범 탄압 때문에 2003년 외교관계를 단절한 EU가 쿠바와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도록 다리를 놓은 것도 프랑스였다.

올랑드 대통령이 아이티에서 박대당한 이유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프랑스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카리브해 국가인 아이티를 공식 방문했다. 아이티는 1804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해 첫 흑인 공화국을 선포한 나라이기도 하다. 

올랑드 대통령의 방문은 사람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그를 반긴 것은 수백여명의 시위대였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13일 보도했다. 먼지나는 흙길 위에서 생수를 팔고 있던 장 마크 부셰트는 “우리는 자유를 얻은 대가로 프랑스에게 국부의 대부분을 빼앗겼다”면서 “그 돈이라도 있었다면 아이티가 지금처럼 못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는 아이티를 식민지배하던 시절 아이티인들을 노예로 부려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했다. 아이티는 당시 전세계 사탕수수의 4분의 1을 생산해낼만큼 비옥한 곳이었다. 백인들로부터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던 흑인들은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1791년부터 시작된 ‘아이티 혁명’의 결과로 노예제가 폐지됐고, 1804년에는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농장과 노예를 잃은 손해를 배상하라며 군함을 이끌고 아이티 주변의 해상을 포위했다. 결국 아이티는 금화 9000만프랑을 ‘독립 배상금’으로 프랑스에 지불해야 했다. 배상금 지불은 1947년까지 지속됐다. 세계 최빈국인데다가 아이티 대지진의 여파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은 아이티에게 역사적 치욕은 더욱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급했던 ‘독립 배상금’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올랑드는 이같은 사실을 인식한 듯 “아직도 우리는 도덕적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독립배상금’의 반환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바꿀 수 있다”면서 아이티에 개발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올랑드 방문 반대 시위대의 반발은 멈추지 않았다. 경찰의 바리케이드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던 아이티의 법대생 짐프스 루시엥은 “프랑스가 배상금만 돌려준다면 우리는 그 돈으로 병원도 짓고 학교도 짓고 도로를 놓을 수 있다”면서 “배상금을 돌려줄 때까지 프랑스 대통령은 절대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소리쳤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