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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창신동 봉제공장 근현대 유산으로 보존된다

도시

by 정소군 2012. 6. 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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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여공’들이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낮엔 ‘수출 역군’, 밤엔 ‘야학생’으로 치열한 삶을 꾸린 구로공단이 산업화·노동민주화 역사의 상징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1983년 한 섬유업체 노동자들이 봉제작업을 하고 있다. _ 경향신문 자료사진

구로공단과 창신동 봉제공장 등으로 대표되는 과거 여성 노동자들의 삶의 공간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보존될 예정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7일 기자회견을 열어 “구로공단, 창신동 봉제공장 등 역사적·예술적·학술적·생활사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근현대 유산을 보존하겠다”고 발표했다. 박 시장은 “자랑스러운 역사는 물론 때론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우리의 과거도 모두 유산으로 보존해 미래세대에서 평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치열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옛 구로공단 지역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기념관으로 만드는 ‘구로공단 역사기념사업’도 추진된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인명진 갈릴리교회 목사를 위원장으로 각계 인사가 참여하는 구로공단역사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구로공단 가발공장에서 일했던 배옥병 전 서통노조위원장(56·친환경 무상급식 네트워크 대표)은 “추운 방에서 아파도 병원에 못 가고 누워 있을 때 가장 힘들었다”며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났고, 한 푼이라도 월급을 더 타기 위해 새벽에 혼자 미싱(재봉틀)을 돌릴 때 많이 서글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 최초의 산업단지인 구로공단은 노동자들이 흘린 땀의 결과로 1970년대 중반 한국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하기도 했다. 구로공단 입구에 수출을 강조하는 입간판이 서 있다. _ 경향신문 자료사진


배씨가 시골에서 상경해 구로공단으로 흘러온 것은 1975년, 그의 나이 19살 때였다. 배씨처럼 시골에서 상경한 10대 ‘여공’들은 낮에는 ‘수출역군’, 밤에는 ‘야학생’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희망을 구로공단에서 품었다. 그러나 열악한 근로조건 때문에 노사분규가 그 어느 곳보다 격렬했다. 유급휴일과 월차, 생리휴가는 물론이고 퇴직금도 받지 못했던 당시 여공들이 주축이 됐다. 그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것인데, ‘기적’만 남고 ‘노동자’는 지워졌다”고 말했다.


창신동 봉제공장 역시 같은 시대 또 다른 여공들이 치열하게 삶과 맞섰던 곳이다.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라 불렀던 서울 청계천 일대 봉제공장들은 1980년대 중반 원남동, 이화동으로 빠져나갔다가 현재는 창신동 일대에 밀집해 있다.


2006년 9월 서울 창신동의 한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마스크를 쓴 채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0평 남짓한 공간 속에서 먼지를 마셔가며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휴일도 모른 채 일한 대가로 여공들이 받은 것은 3500원의 월급이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가족과 오빠,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지금도 화려한 불빛으로 번쩍이는 동대문 패션타운 맞은편 구석에는 3000개의 봉제공장들이 숨어 있다.


서울시는 현재 뉴타운 구역으로 지정돼 있는 창신동 일대의 뉴타운 해제 여부가 결정되는 대로 창신동 봉제공장 보존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옛 달동네의 모습을 간직한 백사마을, 넝마주이 역사를 보여주는 구룡마을 등도 일부 지역의 원형 보존을 추진하며, 소설가 박경리 가옥과 인권탄압의 상징이었던 남산 옛 중앙정보부 건물 등도 보존하기로 했다. 시는 내년 7월까지 미래 후손들이 귀중하게 보존해야 할 ‘서울시 미래유산 1000선’을 확정하기로 했다. 시는 ‘(가칭)미래유산 보존에 관한 조례’도 오는 12월까지 제정하기로 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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