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다. 매미가 울기 시작하는 때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동대문 야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먼저 들어가려는 몸싸움 통에 사람들이 흘린 돈부터 팔목시계까지…, 주워가는 사람이 임자였던 시절. 고교야구 스타였던 선린상고 박노준 선수는 하이틴잡지 인기순위에서 전영록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그가 봉황기 결승전에서 발목을 다치자 9시뉴스는 황급히 주요 뉴스로 타전했고, 병원 앞엔 갈래머리란 갈래머리는 몽땅 다 몰려와 눈물 지었다지.


뭐, 이건 어디까지나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기기 이전의 얘기. 따뜻한 남쪽 찾아 잠실구장으로 떠난 사람들은 돌아올 생각을 않는데. 그러나! 누가 오든지 말든지 뭔 상관이람. 주책없는 매미는 또 다시 울어대고, 봉황대기 깃발은 올해도 줄기차게 휘날린다.




#볼보이는 없다, 볼맨은 있다


비장미 뿜어내며 타석에 선 앳된 타자. 방망이는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는데, 타자 뒤편 관중석엔 때아닌 비명소리. 빨랫줄처럼 깨끗하게 타자의 머리 뒤로(!) 날아간 공에, 방심하고 있던 관중은 기겁을 하고. 기껏 사인 보냈는데 투수는 포수의 급소로만 공을 날리니, 애꿎은 포수는 괜히 한번 벌떡 일어났다 앉고….


마운드에선 사투가 벌어지는데, 스탠드는 한가롭기 그지없다. 관중석은 150명을 넘을까 말까. 바지를 허벅지까지 둥둥 걷어붙인 채 앞좌석에 다리를 턱 걸치고 누운 아저씨, 두 눈 감고 꾸벅꾸벅 조는 할아버지. 그 와중에 아까부터 선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아저씨가 있으니. “용석아, 용석아!” 원정응원 온 학부형인 줄 알았건만. 열번 넘도록 애타게 부르더니 “용석아! 하는 꼴 보니 너 교체해야 쓰겄다. 용석아, 용석아.” 낮술 한잔 걸치셨는지 ‘용석이’에게도 들렸을 그 목청, 보통이 아니다.


마운드 옆을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볼보이(Ball Boy)’의 모습도 보이는데. 아차, 정정하겠다. 동대문에 볼보이는 없다. ‘볼맨(Ball Man)’만이 있을 뿐. ‘Boy’라 하기엔 나이의 관록만큼이나 늘어진 뱃살이 머쓱….






#관중은 없다, 박사들만 있다


동대문야구장의 역대 볼맨은 아마야구계의 쟁쟁한 무림고수들이 거쳐간 자리. 이곳에서 ‘하박사’라 불리는 이 사람도 그 중 한명이다. 동대문야구장 출근 30년 만에 받은 박사학위(?)다.


건설현장에서 묵묵히 미장일을 하던 스무살 청년, 하박사. 누군가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 중계에 점차 정신이 홀리기 시작했다. 9회말 투아웃에 만루, 드디어 역전 홈런! 펄쩍펄쩍 뛰다가 다리에 채여 뒹굴었을 아까운 시멘트 양동이. 바로 다음날부터 그는 동대문에 출근도장을 찍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이, 그런 말 말어. 남들 한창 일할 이 시간에 만날 여기와 앉아있는 사람들은 정상이 아닌 거야. 창피하잖아.” 창피해도 할 수 없다. 아마야구의 마약 같은 매력에 중독된 게 어디 그만의 문제이랴.“고교야구는 철저한 전술과 치밀한 조직력으로 싸우는 프로야구와 달라. 투지 하나로 파란을 일으키는 무명의 팀도 나오고, 16대 1이란 불가능한 스코어도 나오는 건 여기만이 가능해. 난 여기서 인생을 다 배웠어.”


1988년 야구장에서 만나 하박사의 평생지기 친구가 된, 역시 30년 넘는 야구장 붙박이 심박사(46)의 분석이다. 그래서 이들은 1982년, 잠실 대이동의 도도한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았던 것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던가. 서로 이름은 몰라도, 이 곳에만 오면 자동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드는 이들. “그 팀은 글렀어, 그 선수는 좀 싹수가 있네.” “저저, 작전을 저렇게 짜면 안되지.” 장군멍군하며 그들만의 박사급 ‘스탠드 중계’를 나눈다. 프로팀 스카우터들도 조언을 구한다는 최박사까지, 이런 야구박사들이 야구장엔 십수명이 된다.


야구장으로 출근하면,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냐고? 그것이 하박사가 볼맨을 했던 이유. 푼돈이라도 벌어보려 시작했지만 곧 때려치웠다. 공 줍다 고개 들면 안타와 홈런이 팍팍 터지는데 도대체 야구에 집중이 안돼서 그 노릇도 못하겠더란 말이지. 야구장 입구에서 표받는 아저씨도 야구박사 무리의 일원 중 하나였단 말이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자장면. 잠실엔 없다, 동대문엔 있다.


아침 8시부터 마지막 경기까지 스탠드를 지키고 앉으니, 이들은 점심 먹으러 나갈 시간도 아깝다. 동대문야구장에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 자장면을 시켜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한땐 장충동 족발까지 시켜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보다 더 먼 한땐, 버너에다 직접 삼계탕·보신탕까지 보글보글 끓여먹었다.(경기장 내 화기 반입은 금지이니 따라하지 마시길.) 


“그래도 요샌 자제하고 있어. 매점 아줌마들이 장사 안된다고 앓는 소리 하거든.”야구장이 내 집같은 이들에게 매점 아줌마는 가족같은 존재. 30년 넘게 야구장을 함께 지켜온 산증인들이다. 아줌마 중 한명이라도 눈에 띄지 않으면 야구박사들은 “이 할매가 드디어 몸져 누운 거 아냐?” 걱정이 태산이다.


매점 아줌마들의 오매불망 소원은 언제나 서울연고 팀이 이기는 것. 다들 경상·충청·전라도 출신들이건만 한결같이 서울팀의 광팬이다. 왜냐고? “서울팀이 4강, 8강 올라가봐. 학부모, 선생님, 전교생 다 몰려오지. 근데 지방팀은 올라오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봐~ 맥주 사가는 사람이 없잖여.”


그래도 그 나이 먹도록 아직까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건 젊음을 다 바친 이곳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얼마전 TV에서 1970년대 경기를 다큐로 보여주더라고. 그거 보는데 눈물이 찔끔 나서 혼났어. 여기를 가득 메웠던 인파가 아직도 눈에 선한기라. 그땐 바구니 이고 돌아다니는 아줌마들이 80명이 넘었다우.” 동대문야구장이 이렇게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가 싶어 서글픈 김정선 매점할머니(71). 어느새 눈물이 핑글 돈다.


그러나…. 쇠락해 가든 말든 뭔 상관이랴. 여전히 풍운의 꿈을 안은 고교생들은 각본없는 드라마를 펼치고, 야구박사·매점아줌마·볼맨·표받는 아저씨로 구성된 이들 동대문야구단은 여전히 고교야구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남아있어 주는데….


<글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Posted by 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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