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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또 다시 무서운 여름이 다가온다

칼럼

by 정소군 2017. 8. 1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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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집에 에어컨을 달았다. 난생처음 갖게 된 에어컨이다. 문명의 이기에 중독되는 쪽으로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한 발을 내디딘 것만 같아 마음 한편에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거실 벽에 걸린 에어컨을 볼 때마다 안도감으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에어컨 설치 기사와 약속을 잡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약속날짜를 몇차례 변경할 때마다 에어컨 기사는 겁을 줬다. “벌써부터 예약이 밀려오고 있어요. 빨리 달지 않으면 점점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거 감안하셔야 됩니다.” 과연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평일이었음에도 여러 집의 에어컨을 달아주고 저녁 늦게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온 그는 이미 피곤과 땀에 절어 있었다.


“지난해 여름 하도 데었는지, 미리미리 달아놓으려는 사람들이 늘어서 그런가 봐요. 5월부터 이렇게 바쁜 적은 없었는데.” 그는 에어컨을 처음 다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평창동 같은 동네 아니면 에어컨 없이 못 살 것 같아요. 사실 그런 집은 제일 빵빵한 에어컨을 달고 살지만.”


에어컨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내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끔찍했던 지난해 여름의 기억 때문이다. 세상은 에어컨이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뉘지만, 에어컨이 없는 집이라고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맞바람이 부는 시원한 고층 아파트와 오래된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연립 밀집촌은 같은 서울 도심이라도 더위의 ‘클래스’가 다르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옆집이 보든 말든 창문을 활짝 열고, 쿨매트를 침대 위에 깔고, 샤워를 한 후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다시 땀이 났다. 주말 낮에 집에 있다 보면 숨조차 쉬기 힘든 결정적 순간들이 찾아왔다. 집에 가는 게 두려웠다. 일이 끝났는데도 회사에 밤늦게까지 앉아있는 날 보며 부장은 속도 모르고 물었다. “퇴근 안 해? 회사가 그렇게 좋은 거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저 좀 오래됐을 뿐인 평범한 서민 연립 2층에 사는 젊은 나도 이렇게 힘겨운데, 쪽방촌이나 반지하방에 사는 노약자들은 도대체 얼마나 혹독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야근하고 밤늦게 집에 오는 날, 나를 종종 놀라게 하던 할머니가 있었다. 인적 없는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좁은 건물 마당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갑자기 등 뒤에서 스윽하고 나타나던 검은 그림자. 유령처럼 집 주위를 새벽까지 배회하던 사람은 우리 건물 반지하에 살던 할머니였다. 처음엔 ‘노인네가 새벽까지 잠도 없다’ 싶었지만, 곧 깨달았다. 하루 종일 달아오른 찜통 같은 반지하방에 있느니 차라리 밤새도록 집 주위를 뺑뺑 도는 편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란 걸.


지난해 8월, 부산 범일동의 한 여관방에서 임모씨(67)가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기초생활수급자로 1년 전부터 이 여관방에서 지낸 임씨가 계속되는 폭염 속에 열사병으로 숨진 것 같다고 밝혔다. 그 기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그 방은 도대체 얼마나 더웠을까. 얼마나 더우면 21세기에도 방 안에서 사람이 더위로 숨질 수 있는 걸까.


나와 비슷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뉴욕에도 있었나 보다. 지난해 ‘위 액트(WE ACT)’란 뉴욕의 시민단체가 뉴욕시 공영라디오방송(WNYC)과 손잡고 ‘할렘 더위 프로젝트(Harlem Heat Project)’를 벌였다. 이들은 에어컨이 없는 할렘가 임대아파트의 실내 온도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집집마다 센서를 설치했다. 센서에는 방 안 기온이 위험수위에 도달할 경우 자동적으로 단체에 알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까지 탑재돼 있다. 측정된 온도는 WNYC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공개됐다. 측정 결과, 평균 실내 온도는 섭씨 30도에 육박했다.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단체가 주장하는 것은 “집집마다 에어컨을 허하라!”가 아니다. 그들은 “에어컨은 절대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함께 강조한다. 다만, 필요한 곳에 필요한 자원을, 가능한 한 적게 사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 뉴욕만의 이야기일까. 밤에도 에어컨을 틀어놓는 오피스 빌딩과 거리까지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상가의 에어컨 바람. 취약계층을 위한 폭염 대책이라고는 냉방기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무더위 쉼터와 ‘노약자는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캠페인뿐인 한국의 실상도 다르지 않다.


올여름도 평년보다 더울 것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이미 3년 전 기후변화 때문에 2050년까지 열사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2.5배 이상 증가할 것이란 보고서가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별다른 폭염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이 다가온다.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할 여름이 또다시 다가오고 있다.   (2017.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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