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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실화영화 인기인데 왜 다큐는 보기 힘들까

칼럼

by 정소군 2018. 1. 1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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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수 생활을 했던 미국 미주리주 컬럼비아는, 서울에서 평생 살아온 내 기준에서 보자면 ‘시골 동네’와 다를 바 없는 도시였다. 고층 건물도 없고, 4D나 아이맥스 영화를 보려면 차를 타고 1시간 넘게 달려서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시내를 구경하다 “여기서 가장 번화한 곳이 어딘가요?”라고 물었더니, 안내해주던 분이 “바로 여긴데요”라며 멋쩍어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런 ‘시골 도시’에서 놀랍게도 다큐멘터리 영화제와 각종 시사회가 정말 많이 열렸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True/False 필름 페스티벌’. 매해 3월에 열리는데, 그때는 한적한 도시 전체에 활기가 넘친다. 몇 안되는 시내의 극장과 대학 강당까지 총동원돼 수십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상영된다. 일부러 휴가를 내고 다른 도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4월에는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이 주최하는 ‘Third Goal’ 영화제가 열린다.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컬럼비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극장인 ‘미주리 극장’에서는 수시로 각종 다큐멘터리 시사회를 볼 수 있다.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국제 이슈의 현장에는 반드시 ‘그 순간’ ‘그 현장’의 최전선을 지키며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예를 들어 나는 2014년 국제부에서 근무할 때 16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떼죽음을 당한, ‘에베레스트 최악의 날’을 기사로 쓴 적이 있다. 죽은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 시즌을 접고 돌아가겠다고 하는 셰르파들, 등정에 투자한 돈이 아까워 셰르파의 하산 선언에 반발하는 서구 산악인들. ‘True/False 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셰르파>는 내가 외신 기사들을 활자로 접하면서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그 날의 베이스캠프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줬다. 


2014년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참수된 첫 미국인 기자, 제임스 폴리의 이야기를 다룬 〈Jim〉이란 영화도 있었다. 그와 함께 IS 감옥에 수감됐던 동료 종군기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재구성된 제임스 폴리의 마지막 순간이 상영되는 내내 극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그런가 하면 불과 5개월 전 벌어진 미주리대의 학내 인종차별 사건도 스파이크 리 감독에 의해 발 빠르게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됐고, 시사회가 열린 날 미주리 극장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만원사례를 빚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나 뿌듯하다. 내가 머리로만 알던 이슈들, 한 두 컷의 정지된 이미지로만 머릿속에 박혀있던 사연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TV나 신문 뉴스를 통해 다뤄지는 이슈를 보다 생생하게, 서사적으로 이해시켜주는, 매우 효과적이고도 보완적인 뉴스 전달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이야말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웬만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사회다. 실제 <택시운전사>처럼 최근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중 상당수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에서 정작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일은 ‘고도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능하다.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정보를 접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알게 됐다 하더라도 이미 ‘찰나’의 상영기간이 끝난 후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박종필 다큐멘터리 감독의 별세 소식을 접한 후 나는 당혹감을 넘어 적잖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평생 동안 장애인, 세월호 유가족, 빈민의 옆을 묵묵히 지키며 여러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낸 그의 죽음 앞에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 준 친구를 잃었다”며 애끊는 슬픔을 호소하는데, 나는 그의 작품을 한편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나의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치열하게 현장의 최전선을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우리의 접점이 그만큼 작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컬럼비아에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많이 상영될 수 있는 것은 미주리대학이 ‘미주리 극장’을 아예 사들여서 다큐 영화 시사회 등에 종종 장소를 제공해 주는 덕분이기도 했다. 극장만이 아니다. 미드 <하우스오브카드>나 <옥자>로 잘 알려진 넷플릭스는 상업영화뿐 아니라 양질의 다큐멘터리 영화 콘텐츠로도 유명하다. 내가 컬럼비아의 극장에서 봤던 영화 〈Jim〉도 후에 이 영화의 판권을 사들인 넷플릭스에서 언제든 시청이 가능하다.


다행히 최근 <노무현입니다>가 관객수 180만명을 돌파했고, <공범자들>도 호조를 보이며 장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더 많은, 더 다양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 영화 상영 공간이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 미드 보려고 넷플릭스에 들어갔다가 다큐멘터리에 빠졌다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접점을 늘려나가야 더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2017.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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