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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 행복은 7000번을 타고 온다

사람들

by 정소군 2005. 12. 1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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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회원들이 7000번 버스 안에서 포즈를 취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보며 즐거워 하고 있다.


지난 11월5일, 7000번 좌석버스는 과감한 ‘탈선’을 감행했다. 버스라면 자고로 정해진 노선을 따라 수원과 사당역 사이만을 오가야 하거늘. ‘7000번 버스를 타는 사람들’이란 플래카드를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며, 뜬금없이 여의도 한복판을 질주한 것이다. 버스가 멈춰선 곳은 여의도의 한 결혼식장 앞. 한복과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하객들이 줄줄이 뒷문으로 하차한다. 그렇다. 이날은 ‘7000번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카페 운영자, 이상훈씨(31)가 결혼하는 날이었다. 

“상훈이가 결혼한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어? 결혼식 끝나고서도 신림동 피로연장까지 하루종일 대절버스 노릇 톡톡히 해줬지.” 7000번 버스 운전기사 김장도씨(40)와 이의규씨(35)가 껄껄 웃는다. 버스회사에서는 이날 제일 깨끗한 새차를 내줬고, 비번이었던 이들은 금쪽 같은 휴일임에도 서로 자청해 운전대를 잡았다. 

이용객 절반인 2천여명이 회원 

7000번 버스로 시작된 인연은 3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어느 날부턴가 버스 정류장에 ‘7000번 버스를 타는 분들은 카페에 가입하세요’란 광고가 나붙기 시작했다. 상훈씨가 직접 써서 만든 것이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떼어버려도 굴하지 않고 그때마다 다시 붙였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겠어요? 수원에서 사당역까지 출퇴근 왕복 2시간 넘게 한 버스에 탑니다. 하루의 12분의 1, 따지고 보면 1년에 한달 넘게 같이 사는 사이인 거예요. 이게 보통 인연입니까.” 

광고를 본 사람들이 하나 둘 가입하기 시작했다. 버스 승객은 물론, 운전기사에 고속도로 요금소 직원까지. 3주년을 맞은 지금, 회원 숫자는 어느덧 2,000여명에 달한다. 전체 이용객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 

번개치고 고민 나누고 결혼식도 가고… 

7000번 버스 모임이 가동되기 시작한 그때부터 사람들의 출퇴근 라이프가 ‘확’ 달라졌다. 퇴근버스에서 만나면 의기투합해 즉석 번개모임이 만들어질 때도 있다. 중간에 내려 정류장 근처에서 한잔씩 걸치고 다시 7000번 버스에 올라타 각자의 집앞에서 내린다. 지갑을 버스에 놓고 내렸다가 기사아저씨 휴대폰으로 전화해서 “형님, 제 지갑 좀 찾아주세요~” 애교섞인 부탁을 한 적도 있다. 꾸벅꾸벅 졸다보면 운전기사가 “어이, 일어나. 너네 집 다 왔어.” 깨워주시기도 한다. 


카페 운영자 이상훈씨가 정성들여 준비한 집들이 모임.

어디 그뿐이랴. 버스회사 사내 등산대회에 7000번 승객들이 참여하는가 하면, 심지어 수원시청 교통계 공무원들과 버스기사, 승객들이 모두 함께 족구시합을 한 적도 있다. “지난해엔 회원들이 돈을 모아서 기사아저씨들 수고한다고 감사패를 만들어 왔더라니까.” 김장도 기사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카페가 생기고 난 후 사고도 많이 줄었다. 회사에서는 보험료가 낮아지자 연말에 보험료 이익금을 운전기사들에게 보너스로 지급하기도 했다. ‘밀지 마세요’ ‘버스가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해요’ 정도의 살벌한 말밖에 오가지 않는 우리의 출퇴근 버스를 떠올려보면 마치 딴세상 얘기 같다.

그래서 모임의 맏형격인 최관희씨(44)는 비슷한 노선의 다른 버스들도 많은데 늘 7000번 버스만을 기다렸다가 탄다. “가족 같잖아요. 힘든 하루일과 마치고 버스에 오르면 벌써 집에 도착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져요.” 승용차 기름값, 통행료 아끼려고 고생스럽더라도 버스 한번 타보자 시작한 출퇴근길이 그에게 또다른 즐거움이 됐다. 

며칠 전, 새신랑 상훈씨는 카페 회원들을 초대해 드디어 벼르고 별렀던 집들이를 치렀다. 접시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다리가 휘어져라 차려냈다. 그 전날 회사 사람들 집들이는 밖에서 때웠으면서, 카페 회원들만큼은 처제, 동생까지 동원해 모두 직접 요리해 대접한 것이다. 

임신해서 무거운 몸인데도 남편과 함께 참석한 이의규 기사의 부인 임혜숙씨(30)는 “술 취한 승객들이 버스기사들한테 욕설과 폭행을 퍼붓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우리 남편은 정말 좋겠어요”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짜증 사라진 버스, 사고 확 줄었어요 

7000번 버스에서 만난 여성과 사랑에 빠져보고 싶었다던 상훈씨의 꿈은 사내 커플로 결혼에 골인함으로써 없던 일이 되었지만, 아직 남은 목표가 하나 더 있다. 카페 사람들과 봉사활동을 펼치고 싶다는 것. “사실, 이사 가거나 직장이 바뀌거나 하는 이동수가 많아서 회원들과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해나가기란 쉽지가 않아요. 그래도 이 인연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다보면 언젠가 가능하겠죠.” 하기야, 결혼식 때 좌석버스로 하객을 실어나르는 있을 수 없는 일까지 실현시킨 마당에, 이 모임이 앞으로 뭔들 못하겠는가. 

〈글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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