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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총성과 함께 잊혀진 용사 화석 되어서야 영면에 들다 (2005.06.02)

사람들

by 정소군 2018. 6. 2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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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지만. 복덕방 앞에서 장군멍군 주고받으며 평화롭게 늙어가는 흔한 이웃 할아버지로 마주칠 수도 있었을 그. 그러나 그는 이름모를 야산의 조그만 참호구덩이 속에서, 벽에 웅크려 기대앉은 당시 모습 그대로 화석이 된 채 발견됐다. 총성이 멎은 지도 어느덧 52년, 유난히도 화창했던 2005년 6월이 되어서야.



#웅크린 화석으로 발굴된 유해

 

싱싱한 배추밭이 눈부시게 펼쳐진 강원 횡성의 한적한 시골마을 뒷산. ‘6·25 전사자 유해발굴단’의 발굴작업이 한창이었다. 전사한 군인 다섯명을 묻어줬다는 아흔살 할아버지의 제보로 시작된 발굴. 지뢰탐지기의 반응에 따라 곳곳을 파헤쳐 나가자 모두 58개의 참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땅을 삽으로 퍼낸 후 행여 작은 뼛조각이라도 놓쳤을까 파헤친 흙을 다시 한번 체로 걸러주고, 유해가 상할까 호미로 살살 덜어내고…. 수십개의 참호에서 허탕을 친 끝에, 한 몸뚱어리조차 온전히 숨겨주지 못했을 얕은 구덩이 속에서 그의 유해가 발견됐다. “얕은 참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국군이 밀려 올라가던 중 총탄을 피하기 위해 각자 급하게 판 것으로 보입니다.” 유해발굴단을 지원나온 36사단 횡성대대장 장상기 중령이 설명했다. 


지금은 이름없는 야산에 불과하지만 전쟁 당시 이곳은 630고지라 불렸다. 1951년 1·4후퇴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연합군이 이 지역 전투를 발판으로 다시 진격할 수 있었다 한다. 특히 630고지는 주변의 다른 산과 달리 중공군이 아닌 북한군과 격전이 벌어졌던 곳. 산 허리를 중심으로 아래쪽엔 북한군장이, 위쪽엔 국군군장이 발굴되고 있다. 조그만 산허리가 또다른 38선이 된 셈이다.


그 역시 목숨이 촌각을 다투던 그때, 허겁지겁 이 작은 참호를 팠을 것이다. 원치 않았던 총을 손에 쥐고, 쏘고 싶지 않았던 옛 이웃에게 총을 쏴대고, 죽고싶지 않았던 머나먼 타지에서 죽어갔을 그. 갈비뼈는 조각조각 부서졌고, 두개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산엔 유난히 승냥이가 들끓었다고 한다. 그를 양분삼아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뿌리가 단단히 움켜쥔 덕에 벽에 기대앉은 골반과 다리뼈만이 제 모습을 유지했다. 


그로부터 불과 5m쯤 떨어진 참호 속에서도 두명의 유해가 나란히 발굴됐다. 서로를 의지하며 몸을 숨겼을 그들은 죽어서도 서로를 의지한 채 잠들어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들이 남긴 유품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유해발굴단 노행호 팀장은 “만년필, 안경알, 담배파이프 등 다양한 유품들이 발굴됩니다. 신원확인에 가장 도움이 되는 군번줄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어요. 포로가 되면 가족에게 해가 돌아갈까봐, 사투를 앞두게 되면 목에서 끊어냈다고 하더군요”라고 전했다. 가장 많이 발굴되는 유품은 검붉게 녹슨 숟가락이다. 그들은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품속에서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가족들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52년만의 영면 


참호별로 흩어져 각자 유해발굴에 여념이 없던 단원들이 모두 작업을 멈추고 그의 유골 앞에 모여들었다. 유해를 수습하기 앞서 제를 지내기 위해서다. 유해발굴병이 화석처럼 파묻힌 그의 뼈를 조심스레 파내 깨끗한 한지에 곱게 쌌다. 뼈의 위치를 최대한 제 모습대로 수습한 후 태극기로 덮은 관속에 넣었다. 한많은 삶, 이제는 영면하시라고 혼백함까지 붙여준다.


노팀장은 가는 길, 마지막으로 목이나 축이시라며 마른 한치를 안주로 놓고 막걸리를 뿌린다. 막걸리는 금세 흔적도 없이 땅에 스며든다.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 잠시의 묵념. 후배전우들의 경례를 받으며 그의 운구는 52년 만에 산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일은 그가 죽어서도 애타게 그렸을, 그가 죽은 후에도 애타게 기다렸을 유족을 찾아주는 것이다. 유해에서 DNA를 채취한 후 유족의 DNA와 비교해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 발굴단을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경우는 유족이 DNA를 등록해 놓지 않아 유해를 발굴하고도 가족을 찾아주지 못하는 때다. 


“유품 등으로 신원이 확인됐지만, 부모·형제가 모두 죽어 그를 기다리는 혈육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도 있어요. 안타깝죠. 그럴 때마다 ‘왜 좀더 일찍 찾지 못했던가’ 가슴도 아프고….” 민간 발굴단원 박선주 충북대 교수가 씁쓸히 말했다. 


유해 한구라도 더 발굴하고 싶어 제대 1주일을 앞두고 휴가까지 반납한 유해발굴단 박상현 병장(32). ‘그’는 어쩌면 박병장의 손으로 수습한 마지막 유해가 될지도 모른다. “DNA 감식절차가 끝날 반년 후쯤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될 그의 무덤에 매년 찾아와 줄 가족을 찾으시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630고지 야산에서 발굴된 유해는 모두 4구. 할아버지의 제보대로라면 1구를 찾지 못했다. 반세기의 기나긴 세월, 찾아주기만을 기다리다 지치신 것일까. 부디 할아버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횡성|글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사진 김영민기자 viola@kyunghyang.com〉




▲실종 유해 아직도 10만3천여명 


현재 국립현충원에 잠든 호국영령은 17만8천여명. 종전 반세기가 지나도록 찾지 못한 전사자 유해는 안장된 숫자의 절반도 넘는 10만3천여명에 달한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단’은 이들의 유해를 발굴, 안장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육군 발굴단원 18명과 민간 전문발굴요원 16명으로 구성돼 있다. 2000년 전쟁 50주년을 맞아 한시적 사업으로 시작됐으나 2003년 영구사업으로 전환됐다. 


제보자 증언이 발굴작업에 결정적 도움이 되지만, 6·25전쟁 당시 생존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굴단원들이 전국을 누비며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워낙 인력이 부족해 발굴사업의 빠른 진척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연간 6백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JPAC(합동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사령부)를 설치, 활발한 발굴작업을 펼쳐오고 있다.


6·25 전사자 제보접수 (042)550-1354, (02)505-1354. 홈페이지 http://www.army.mil.kr/yealin/y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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