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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공정함에 집착하는 불공정 사회

칼럼

by 정소군 2018. 1. 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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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에게 조약돌을 가져오면 오이 조각으로 교환해주는 실험을 했다. 거래에 만족한 원숭이들은 열심히 조약돌을 주워 왔다. 그러자 연구자는 한 원숭이를 골라 거래 조건을 바꿔 봤다. 다른 원숭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원숭이에게만 오이 조각 대신 더 맛있는 포도알을 준 것이다. 화가 난 원숭이들은 연구자의 얼굴에 오이를 던졌다. 원숭이도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면 분노한다.


원숭이조차 아는 이 ‘공정성’이란 개념은 아직 사리분별을 잘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도 민감하다. 아이들은 6~7세만 되면 “오빠(혹은 형·누나·언니)만 더 주는 건 불공평해!”라고 부모에게 당당히 항의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자신이 받은 것과 남이 받은 것을 비교해 ‘무임승차자’를 가려내려는 본능이 있다.


그런데 사실 공정하다는 것만큼이나 모호한 개념도 없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다’는 이 단어의 뜻은, 같은 언어를 쓰는 정반대의 주장이 맞부딪치는 현실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복지 확대를 위해 부자 증세를 하는 것은 부자에 대한 강탈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던 티 파티(Tea Party)도,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부자 증세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월가 점령 시위대도 똑같이 소리 높여 말했다.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그래서 결국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 


예산이 한정된 상황에서 소수의 장애아를 위한 전용 놀이터를 만드는 건 불공정한 일인가. 난파된 배에서 구명보트에 탈 사람을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것은 공정한 일일까.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보석금을 낸 피의자를 풀어주는 것은, 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피의자의 상황에 비춰볼 때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놓고 보면, ‘객관적인’ 정답이 존재하는 공정함이란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공정한지는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이 어느 가치관에 중점을 두고, 어떻게 합의해 나가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공항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며 들었던 피켓 문구.


지난 23일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방안 공청회’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 중 하나는 ‘공정성’이었다. 한 신입사원은 마이크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힘든 취준생(취업준비생) 시절을 거쳐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정규직들이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려고 하느냐. 오늘은 수능날이다. 힘들게 수험생활을 한 후배들에게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 그들은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이라는 피켓도 들었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시달려 온 우리가 ‘능력주의’에 따른 엄격한 공정함을 요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공정한 사회의 약자였을 사람들이 힘들게 노력한 대가로 시험을 통과해 정규직이 된 것 역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정규직 되고 싶은 비정규직은 시험 치르고 들어오라”는 말에서는 숫자와 등수로 환산될 수 있는 시험만이 공정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잣대라 여기는 강박을 감지하게 된다. 도대체 15년 동안 인천공항의 특수경비원과 환경미화원으로 일해온 사람들이 정규직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공정한’ 시험이 뭔가. 경영? 토익? 인·적성 검사? 지난 15년 동안 보여준 업무태도와 성과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잣대가 아닌가. 


<시험국민의 탄생>(푸른역사)의 저자 이경숙은 자신의 책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시험의 난관을 돌파한 승자들은 어렵게 얻은 서열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서열화 기준이 단순해질수록 모든 대상들은 명쾌하게 서열화된다. 낮은 역전 가능성은 서열의 특권을 더욱 강화한다”고 썼다. 그는 “(시험은)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서열은 보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폭력적 권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날 공청회에서 11년차 환경미화 노동자는 “청소, 경비 같은 일은 취준생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아니다. 우리가 정규직의 몫을 뺏자는 게 아닌데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 정규직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정규직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어렵게 일하는 건 알지만, 여러분만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비정규직에게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선물도 주지 않느냐.” 이것은 ‘을’인 정규직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자격만으로 비정규직을 ‘병’으로 서열화하고, 그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1% 대 99%’의 사회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힘들게 버둥거리며 살고 있단 것을 안다. 그래도 자신의 힘듦과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에만 집착해 타인의 노력을 폄하하는 ‘불공정한’ 사회는 되지 않길 바란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단 하나의 잣대로 공정함을 평가하려는 ‘불공정한’ 잣대도 만들지 않기를. (2017.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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