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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김민선과 리바이어던

칼럼

by 정소군 2018. 1. 1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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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배우 김규리씨가 출연해 두 눈이 퉁퉁 붓도록 9년 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나에게는 아직 ‘김민선’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그의 지난 삶은 2008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 전과 후로 나뉜다. 1044자에 달하는 긴 글이었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비유로 든 ‘청산가리’, 단 네 글자. 이후 9년 동안 그는 “청산가리 먹겠다더니 왜 안 먹었어?” “너 아직도 안 죽었니?”라는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그 때문에 ‘김규리’로 개명까지 했지만 ‘청산가리 여배우’라는 프레임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죽어, 죽어, 하니까 (실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지금도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 중 가장 좋아하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의 호기심 많은 여고생 민아와 드라마 <현정아 사랑해>(2002)에서 매사 실수투성이지만 쾌활하고 정의로웠던 독립프로덕션 조연출 현정이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 역시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청산가리’가 따라붙는 자동연상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산가리 하나만 남게 왜곡했던 누군가가 있을 거예요. 그 누군가가 제가 열심히 살고 있는 틈 사이사이에서 왜곡했어요.” 그의 말처럼, 얼마 전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에서 문성근, 명계남과 함께 김민선의 이름이 발견됐다. 문성근씨는 본인도 국정원이 조작한 나체 합성사진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후배 김규리의 고통을 어루만져 달라고 호소했다. “한창 자신을 키워나갈 30대 초반에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해달라.”


김규리라는 배우의 커리어가 이명박 정부의 방해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역사가 그렇듯 개인의 삶에도 ‘가정’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가가 개인의 삶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순간 자연인이 책임져야 할 영역과 국가권력의 영역이 뒤섞이고 혼재되면서, 김규리라는 배우의 커리어와 이후 그 개인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으로부터 정부는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왜곡되고 일그러진 삶을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이명박 정부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잃어버린 지난 9년을 도대체 무슨 수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명박 정부는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영화 <리바이어던>의 한 장면


러시아 영화 <리바이어던>이 떠올랐다. 이 영화는 성경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바다짐승 ‘리바이어던’처럼 괴물 같은 존재가 돼버린 국가권력 앞에서 개인이 어디까지 무력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자동차 정비공인 콜랴는 바닷가 마을의 외딴집에서 사랑스러운 아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아버지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부패한 시장 바딤이 호화별장을 짓기 위해 그의 집을 빼앗으려 하면서 콜랴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법과 상식에 호소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시장은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간다.


유능한 변호사 친구가 그를 돕기 위해 찾아오지만 그 역시 바딤이 고용한 폭력배에게 구타를 당한 후 겁을 먹고, 국가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던 아내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던 남편의 변호사 친구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을에서는 콜랴가 아내를 죽인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사이 좋은 이웃이었던 주민들이 하나둘 콜랴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콜랴는 집도, 가족도, 친구도 잃고 철저히 고립된 채 무너져버린다.


이 영화에서 콜랴의 집을 빼앗아간 건 누구일까? ‘리바이어던’이다. 그렇다면 콜랴가 아내와 친구와 이웃까지 잃게 된 것은 누구 때문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평상시 아내와 이웃들에게 굳건한 신뢰감을 주지 못한 콜랴, 자신의 탓인가? 그렇지 않다. 리바이어던에 비유될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국가권력의 부당한 개입이 틈새를 파고들어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고, 그 순간부터 개인의 책임과 국가의 책임은 구분할 수 없게 됐다.


국가가 누군가를 고문하고 9년 동안 감옥에 가둬야만 잃어버린 9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만든 문서에 ‘김민선’이란 단 세 글자를 적는 것만으로도 배우 김규리의 지난 9년은 개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국가는 “세금을 안 밀리려고 돈 없으면 은행에서 빌려서라도 세금을 냈다”는 김규리씨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밀어 넣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규리씨는 이명박 정부의 ‘리바이어던’ 어깨 위에 올라탄 사람들로부터 악플과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여전히 재능있고 아름다운 배우 김규리씨에게 마음 깊이 응원을 전한다. (2017.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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