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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탐정이 된 의사들]“산재 조사과정서 느낀 ‘그들의 억울함’ 나도 트라우마 생길 정도”

경제노동

by 정소군 2018. 3. 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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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과 질병의 관계를 파헤치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4명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공유정옥·최민·이혜은·류현철 전문의. 김영민 기자



ㆍ“투자와 관심 없으면 산재·직업병은 사회적으로 유전되고 진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펴낸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의 공저자인 류현철·공유정옥·이혜은·최민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를 한자리에 모아 그들이 보고 겪은 생생한 산재 현장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직업환경이 점점 나아지리란 믿음이 있었지만, 노동시장이 불안정해지고 파편화되면서 재래형, 산업국가형, 60년대형 산재사고가 다시 증가하는 등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다”고 말했다. 


직업과 질병의 관계를 파헤치는 ‘탐정’ 


-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란 말이 아직도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공유정옥(이하 공유) = 우리 사회가 직업병에 겨우 관심을 갖게 된 때가 문송면군의 죽음과 원진레이온 사태가 알려진 1988년 무렵부터였다. 산업의학 전공이 처음 생긴 게 불과 22년 전이었으니까. 내가 전공의였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국의 산업의학 전공의를 다 합쳐도 50명이 채 안됐다. 우리 부모님도 한동안 계속 물어봤다. ‘네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뭐라고?’ 심지어 같은 의사들 중에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있다. 산부인과, 성형외과 하면 무슨 과인지 바로 알듯이 직업환경의학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요샌 가습기 살균제, 삼성 백혈병이 이슈가 되면서 ‘그런 사건의 원인을 찾는 일을 한다’고 설명하면 감을 잡으시더라. 한편으론 슬픈 일이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직업과 질병의 관계를 파헤치는, 일종의 ‘탐정’ 같은 역할을 한다. 의사들이 병원에서 시신과 차트만 보고 사망원인을 판단할 때 이들은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증거를 수집하고, 때론 진술해 줄 동료 노동자를 찾기 위해 현수막까지 내건다. 

 2014년 조선소에서 일하다 사망한 23살 젊은 하청노동자의 죽음도 류현철 전문의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돌연사로 묻혀버렸을 사건이었다. 청년은 태양이 작열하는 8월의 한낮, 작업장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고 응급실에 실려 갔지만 곧 사망했다. 담당 의사는 사망원인으로 심근경색을 의심했다. 국과수 부검까지 거쳤지만 결과는 ‘원인불명’으로 나왔다. 오전까지도 멀쩡했던 20대 초반 청년의 급작스러운 죽음. 가족들은 그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산재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류현철(이하 류) = 이런 경우 일단 현장을 가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사측이 거부해서) 현장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은데, 당시엔 다행히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아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들어가더라도 그때 그 시간이 아니면 의미 없는 경우도 많다. 내가 간 게 가을이었는데 실제 사건은 한여름에 일어났으니까.


최민(이하 최) = 맞다. 막상 사업장에 들어가보면 미리 싹 청소해놓고, 평소 닫아놓던 창문도 열어서 환기시켜놓고, 작업량을 그날만 잠깐 줄여주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많다. 


류 = 그래서 우리는 여러 단서들을 놓고 조각난 퍼즐을 맞춰야 한다. 먼저 현장에서 고인이 했던 일을 확인해보니 선박 내부에서 철판을 물샐틈없이 용접하는 작업이었다. 한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품은 강철 구조물에 100~120도의 열을 가하고, 온갖 거추장스러운 보호구와 장비를 걸친 채로 몸을 쪼그리고 비틀어야만 하는 환경. 기상청에 그날, 그 시간의 기온을 체크했다. 사망 직전 간효소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는 응급실 소견서 등 실마리를 하나하나 맞춰본 결과 열사병을 의심하게 됐다. 결국 그 청년은 열사병으로 활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점심에 먹은 라면이 기도를 역류해 기도폐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산재로 인정이 됐다. 


- 처음 간 병원에서 의사가 ‘심근경색’이라고 소견을 말하면 대부분은 그걸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묻혀버리는 산재 사망이 많을 것 같다. 왜 응급실 의사도, 담당 의사도, 부검의도 그 청년의 진짜 사망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걸까. 


류 = 부검의나 병원 의사가 의학적으로 틀린 결론을 내린 건 아니다. 다만, 그분들의 자리에서는 보이는 게 그만큼인 거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말이 안되는 지점이 있거든. 우리는 현장과 과정을 다 들여다보니까 그들이 못 보는 걸 찾을 수 있다. 요새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숫자가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지금도 대부분은 건강검진만 하지 현장을 다니는 의사는 많지 않다. 자리에 앉아 반나절 만에 100~200명의 건강검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의사들이 굴뚝에 들어가게 해줘야 하는데, 연기밖에 못 보게 되는 거다. 


- 수없이 많은 직업병 환자들을 만났을 텐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었다면. 


류 = 지난해 70대 중반의 노인 한분이 지인 소개로 우리 센터에 찾아오셨다. ‘이것도 상담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꺼내시더라. 정말 열심히 사신 분이었다.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부산의 고무공장에 취업해 알뜰히 돈을 모아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나중엔 그 공장을 인수하셨다. 그런데 50대 중반 무렵, 외환위기로 공장이 도산한 거다. 결국 60대에 다시 공장노동자가 됐고, 주물공장에서 쇳물을 부어 중자 만드는 일을 하셨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공장에서 크레인 사고가 발생한 거다. 동료 노동자가 떨어진 중자에 깔려 사망했다.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 정리하는 일을 그분이 다 하셨다. 트라우마가 심해서 며칠 쉬다가 다시 출근했는데, 일을 할 때마다 자꾸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죄책감이 들더란 거야. 자기가 만든 중자에 맞아 동료가 죽었다는 생각 때문에 본인 돈으로 절에서 고인의 천도재까지 지내주셨다고 했다. 그분 잘못도 아닌데.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공장을 나오셨지만, 먹고 살려면 일을 안할 수가 없잖아. 다른 공장에 다시 취업을 했는데, 거기서 또 산재사고가 발생한 거다. 자기를 그 공장에 소개해 준 동료가 지게차에 깔려서 과다출혈로 숨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공황장애가 생기셔서 일을 그만두실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산재 인정을 받으시긴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매해 2000여명이 산재사고로 목숨을 잃는데 그분은 1년 새 두번이나 동료의 사망을 목격한 거다.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결국 안전 조치 없이 불안 불안하게 크레인, 지게차 일을 해야 하는 사회 구조 때문이다. 


공유 = 내 경우엔 너무 많은 얼굴들이 떠올라서 기억에 남는 한분을 고르기 어려운데…. 일단 반올림 활동을 하기 전과 후로 나눠보자면, 반올림 전에 가장 인상 깊었던 분들은 열차 기관사들이다. 2003~2004년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기관사들과 함께 치료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 모임은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끝내야만 했다. 겉보기에는 너무 멀쩡하고 체격도 좋은 30대 중반의 남성들이었는데, 어두워지면 무서워서 길을 못 다니시거든. 본인이 기관사면서 지하철도 무서워서 못 타고, 사고 뉴스를 보면 증세가 악화돼서 TV도 못 본다. 광장공포증 때문에 마트나 극장도 못 가고. 


- 기관사들이 당장의 불규칙한 근무시간이나 장시간 노동보다 사고 트라우마를 더 힘들어한다는 게 일반인들은 잘 짐작이 안 갈지도 모르겠다. 


공유 = 그냥 언뜻 말만 들으면 감이 잘 안 올 수도 있는데, 예전에 철도 화물차를 얻어타고 가면서 기관사·부기관사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그분들 얘기가 밤에 시골길을 달리다가 ‘뭘 친 거 같다’는 느낌이 들면 일단 열차를 세운대. 그리고 어두컴컴한 시골길에 손전등만 들고 나가서 철도 아래, 양옆을 뒤지는 거다. 아무것도 안 보이길 바라면서. 보통 열차에 치인 사체는 옆으로 튕겨 나갈 수도 있어서 수풀 속도 뒤지고. 

 뒤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지. ‘제발 아무것도 나오지 마라’ 생각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대답이 뭐였는지 아나? ‘발을 발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뒤진다는 거야. 저쪽에서 “여기 뭐가 있다”고 소리치면 서로 빨리 뛰어간대. 먼저 발을 잡으려고. 훼손된 시신 중 그나마 덜 끔찍한 게 발이니까. 얼굴을 보면 그 잔상이 잊혀지질 않으니까. 그렇게 사체를 발견하면 사체 조각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찾아서 뒷자리에 태운 후 다음 정거장까지 간다는 거다. 어릴 때 공포영화 한편 본 것도 평생 각인되는데 그런 경험을 직접 겪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이혜은(이하 이)= 나는 10년 전 전공의 시절, 한 수녀님의 제보로 알게 된 필리핀 이주 여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스티븐존슨증후군에 걸려 온몸에 발진이 생기고 독성 간염이 심해서 이미 중환자실에 들어간 상태였다. 일하면서 유독물질을 다뤘다고 하더라. 교수님과 함께 사업장 주소만 달랑 들고 무작정 공장으로 찾아갔다. 옛날 폴더형 휴대폰 케이스 만드는 회사였는데 트리클로에틸렌(TCE)을 가득 부은 수조에 휴대폰 케이스를 흔들어 세척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몽땅 이주 여성들이더라. 그분은 결국 얼마 안 가 임종하셨는데,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연고도 없는 우리가 시신을 확인하고 임종을 지켜야 했다. 전신에 발진이 퍼져 이국만리에서 끔찍한 몰골로 돌아가신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직업병 조사하는 기관에 취업해 평생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인 것 같다. 


공유 = 나도 반올림 활동 하면서 서울성모병원에서 임종을 지킨 노동자만 세분이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분, 12년 동안 투병하다가 재생불량성 빈혈로 피를 쏟아가며 죽어간 31살 노동자, 골수이식 치료받고 부작용으로 사망한 분. 나는 투병 초기 그분들의 예쁘고 멋있었을 때 모습을 아는데,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참혹한 거다. 세분 모두 살아생전 회사로부터도, 정부로부터도, “당신의 병은 (당신 잘못이 아니라) 직업병입니다. 치료를 도와줄게요. 설령 잘못되더라도 가족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는 지급될 테니 걱정마세요”라고 약속을 받기는커녕, 배신감과 죄책감, 비통함에 싸여 돌아가셨다. 시신이 누워있는 병실, 피부로 느껴질 만큼 병실을 떠돌던 한, 그 옆에 넋을 잃고 서 있던 유족들. 그런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 나도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다. 나중에 나도 치료를 받으려 한다. 


직업병이 사회적으로 유전 되는 사회 


- 일반 시민들은 ‘산재사고로 누가 사망했다’는 한 줄의 뉴스로만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 한 줄에 담긴 무게를 쉽게 가늠하지 못한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건 초기부터 마지막 시신의 모습까지 가까이서 목격해야 하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은 정신적 고통과 부담감이 상당할 것 같다. 


류 = 산재 승인을 받아내면 그나마 덜한데, 그렇지 못할 경우 특히 그렇다. 조선소 열사병 사건의 경우도 그랬다. 처음에 “23살 청년이 작업현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는 말을 전화로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청년의 사진을 보고, 가족들이 보내준 카톡 캡처 자료를 검토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니 나도 절박해지는 거다. 

 고인이 작업반장과 나눈 카톡 대화를 보면 ‘연차를 내고 쉬고 싶습니다. 절대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한테 정말 미안하고 반장님께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반장이 ‘엿 먹어라 이기네?’라고 대꾸하자 그는 바로 ‘출근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직영(원청) 추천을 받기 위해 온갖 것을 감내하면서도 자기가 쉬면 이주노동자 동료인 ○○○의 일이 많아질까봐 미안해하던 사람인데, 산재 승인을 못 받아내면 두고두고 그 휴대폰 문구가 떠오를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숱한 죽음들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답답하다. 


최 = 이런 사고가 특히 파견 노동자들에게 많이 발생한다. 계속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노동자들은 환기구가 고장나면 고장났다는 걸 바로 알고, 동료들이 하나둘 비슷하게 아프기 시작하면 바로 산재를 의심할 수 있는데, 오늘 갑자기 현장에 투입되는 파견 노동자들은 알 길이 없다. 파견 노동자끼리는 워낙 자주 바뀌니까 서로 이름도 잘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한다. 서너달은 일해야 말을 붙이기 시작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누가 언제 왔는지, 누가 아팠는지, 그런 것도 모르고 일한다. 아프기 시작할 때는 이미 그곳을 떠난 후일 때가 많고. 이주노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비자를 연장해도 한국에서 10년 이상 일할 수 없다. 사실 알려지는 산재사고는 급성 독성사고 같은 극히 일부이지만, 그분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10년 후 암에 걸리더라도 아무도 알 수 없고,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옛날식, 재래형, 산업국가형, 60년대형 산재사고가 다시 21세기에 되살아나고 있는 이유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진전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류 = 직업성 질환과 일반 질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예방 여부다. 투입 대비 예방 가능 효과를 놓고 봤을 때 유전적 질환은 쉽지 않다. 그렇게 보면 직업성 질환에 많이 투자를 해야 한다. 막을 수 있으니까. 


공유 = 근데 안하지. 왜냐면 한국에선 목숨값이 더 싸니까. 


류 = 앞으로는 직업성 질환도 유전될 거 같다. ‘사회적 유전’ 말이다. 사회적 틀이나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 자식세대도 지금과 비슷한 노동환경에 노출될 거고, 결국 직업성 질환이 아버지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사회적으로 유전되면서 진화해 나갈 거다. 


- 그럼 지금의 사회적 틀을 바꾸기 위해 가장 시급한 건 뭘까. 


공유 = 한국만 이런가 싶어서 미국의 광산법 역사를 되짚어 본 적이 있다. 역사가 189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광산 노동자가 1년에 2000명 넘게 죽었는데, 아무것도 안했다. 그래서 그 후 10년 동안 매해 2000명씩, 다 합치면 2만명이 죽은 거다. 그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다 죽으면 사회가 뒤집어지고 특별법이 제정될 텐데 여기저기서 띄엄띄엄 죽으니까 심각성을 모르는 거야. 1977년에야 처음으로 광산안전보건법이 제정돼서 포괄적 대책을 만들고, 광산에 들어가서 현장조사하고, 규정을 위반한 사업주를 처벌하기 시작한다. 그다음부터 사망자가 285명으로 줄어들었다. 진작 그렇게 했으면 죽지 않아도 됐을 수만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걸 보면서 ‘한국만 이런 건 아니구나’ 이상한 위안을 받은 것과 동시에 아무리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실제로 가동하게 하는 것은 결국 조직된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정치적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힘이 미약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강력한 법을 만들어도 소용없다. 법을 어긴 사업주가 처벌받지도 않고, 임상의사들은 제대로 진단을 못하고, 파견 노동자들은 병 걸려도 이미 다 그 사업장을 떠나고 없고. 

 제 생각은 법 강화보다 먼저 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를 주고, 조합원 2명 이상이 동시에 같은 병으로 아프다고 하면 노조가 산재 의심 신고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다. 사람들이 작업환경 안전을 위해 뭘 바꿔야 하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그때마다 일단 민주노총 위원장부터 풀어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 = 맞다. 산재 사고는 무조건 점수에 반영되니까 사고가 나면 사측이 ‘공상 해줄게 신고하지 말라’고 나오는데, 노조 힘이 약해지면서 질병판정위원회 승률이 떨어지니까 이제 근골격계 같은 직업병은 ‘그래, 어디 한번 산재 가봐’ 이런 식으로 나온다. 


류 = 의학적 기준을 엄격하게 따져서 산재 여부를 판정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얘기다. 같은 증상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니까. 노조의 힘이 약해지면 인정 기준을 엄격하게 강화하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뀐다. 근골격계 질환 같은 게 단적인 예다. 


공유 = 버스 타고 가다 보면 아직도 ‘간첩신고 112’ 스티커가 붙어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나는 ‘산재가 의심되면 ○○○’ 이런 식으로 딱 10년 만 전국적 캠페인을 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런 캠페인의 필요성을 절감한 사례가 있었는데, 어떤 학교 급식실 노동자 전원이 5년 이상 ‘괴질’에 시달렸다. 식기세척기 당번을 하는 날이면 이상하게 눈이 아프고 피부가 뒤집어지는 거다. 처음엔 세척제 문제인가 싶어서 세척제를 바꾸고, 온도도 바꿔보고 했는데 그래도 안 나았다. 

 근데 우연찮게 우리 센터와 연결이 닿게 됐다. 면담을 시작했는데 한시간 만에 바로 감이 오더라고. ‘아, 이건 자외선으로 인한 증상이다!’ 현장조사를 하러 갔는데, 이상하게 식기세척기 주변에 자외선이 없어. 이거 뭐지, 망했다, 그러고 돌아서는데, 바로 뒤에 곤충 잡는 램프가 보였다. 조사해 보니 거기 자외선 C램프가 붙어있었던 거다. 원래 곤충 잡는 건 A램프를 껴야 하는데 잘못 낀 거지. 이거 정말 연구사례다. 해외에서도 몇달이면 몰라도 몇년씩 자외선에 그렇게 노출된 경우가 없었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와 진작 상담했으면 바로 1시간 만에 알아낼 수 있는 건데, 이게 5년이 걸렸다. 그 급식조리원들은 자기들이 귀신들린 거 같다고, 굿을 해야 하나, 5년 동안 그러고 있었다더라. 


류 = 눈 아프고 피부 질환 생길 때마다 여러차례 병원도 가봤을 텐데 어느 의사도 산재 관련성을 조언하지 않았던 거네. 연고 바르란 말만 하고. 


공유 = 일반 의사들도 직업병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환자에게 무슨 일 하시냐고 물어보고, 퇴근한 후부터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면 직장에 원인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만도 하잖은가. 그럴 때 의사들이 직업환경 관련 기관에 문의하거나 신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어디까지 다쳐야 작업을 중단하나


- 최근 들어 메탄올 실명사고부터 구의역 김군에 이르기까지 안타까운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에어컨 설치기사들이 안전장치도 없이 일하다가 추락하는 사고가 빈번해지기도 한다. 본인이 위험하다고 느끼면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법에 있지 않나. 


류 = 산업안전보건법에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권리’가 보장돼 있다. 그런데 여기서 ‘급박’이란 표현이 너무 축소해석되고 있다. ‘급박’을 단순히 ‘일을 중단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아’로만 해석해선 안된다. ‘이 냄새를 계속 맡으면 10년 후에 암 걸릴 것 같아’까지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법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되냐면, 작업거부권을 행사해 대피하면 사측이 불이익을 주고 심지어 민사소송까지 건다. 재계는 이 법이 ‘남용’되면 실질적인 파업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거든. 그럼 우리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다. 남용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노동자들이 ‘노’라고 말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해주면서 남용의 부작용을 축소해갈 것이냐, 아니면 남용이 무서우니까 ‘사람 몇명 죽어도 어쩔 수 없지. 죽으면 산재로 보상해주면 되지’하고 금지할 것이냐. 안전과 생명에 가치를 둔 사회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최 =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가 작업 도중 손가락이 찢어져서 작업을 중단했다가 나중에 사측으로부터 별거 아닌 상처로 지나치게 작업을 지연시켰다고 2주간 징계를 받았다. ‘몇바늘 꿰맨 상처 vs 한시간 작업중단 손실 3억3000만원’ 이런 식으로 압박한 거다. 그럼 어디까지 다쳐야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건가? 팔이 잘려야 하나? 죽어야 하나? 구의역 김군이 “2인1조 아니면 작업 못하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고, 세월호 선원이 “이런 식으로 화물 싣고는 못 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회사에 앙심을 품고 ‘악의적’으로 한 경우만 아니면, 노동자의 작업거부권이 폭넓게 보장된다. 


-막상 산재사고로 인명피해가 발생해도 사업주들은 ‘우린 몰랐다’는 말만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삼성·LG 휴대폰 부품 하청업체에서 불법파견으로 일하다 메탄올에 중독돼 6명이 실명하거나 실명 위기에 빠졌는데도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공유 = 자동차로 인명사고를 내놓고 ‘사람이 죽을지 몰랐다’고 주장한다고 용서해주지 않잖아. 그게 당연한 건데 왜 산재는 다른 잣대를 대는지 모르겠다. 


최 = 삼성중공업 크레인 참사도 6명이 숨진 인재인데 현장 노동자만 구속되고 사장은 입건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거다. 만날 ‘안전문화’ 강조하는데, 그 안전문화는 노동자 한명 한명이 조심한다고 달성되는 게 아니다. 사업주가 예산을 투입해야만 가능한 거다. 작은 사고는 노동자들이 조금 주의하면 줄일 수 있지만, 중대재해는 캠페인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펜스도 없이 고공작업하는 노동자가 아무리 조심해도 안 떨어질 수 있나. 

 원청도 책임을 져야 한다. 원청도 산재율이 높으면 공개입찰에서 불이익을 받으니까 산재 발생한 하청업체랑 계약을 안 맺는다. 그러고선 자기네 안전관리를 강화했다고 홍보하는데, 사실 안전은 공정속도를 늦추거나 사람을 더 많이 투입하는 데서 접근해야 한다. 그걸 할 수 있는 건 원청이다. 근데 원청이 그런 건 손대지 않고 사고 없애라고 하청을 쥐어짜면 사고를 숨기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거다. 


이 = 산재사고로 사망하거나 독성물질에 중독되는 극단적인 케이스들도 많지만, 사실 일반 시민들도 산재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건 마찬가지다. 많게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일터에서 보내는데 건강이 일터와 떨어질 수 없다. 사업장을 다니다 보면 무력감을 느낀다. “콜레스테롤 높으니 운동 좀 하시고요”라고 말하면 “저 집에 들어가면 밤 10시예요. 어떻게 운동을 해요”란 답이 돌아온다. 


최 = 현장실습 고등학생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많이 발생해서 다들 안타까워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렇게 산재가 많은 나라에서 청소년이 안전할 수가 없다. 누구한테나 안전해야 청소년도 안전한 거다. 예전에 나이 많은 진폐증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 아버지가 탄광 광부셨다. 진폐증 걸린 동료들을 많이 봐서 아들한테 “너는 절대 광부하지 마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광부 대신 석공일을 하셨는데 그분도 결국 진폐증에 걸리신 거다. 그런 걸 보면 그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전한 게 아니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깝다. 판사, 의사, 사무직, 누구든 일 때문에 죽을 수 있다. 같이 건강해지는 세상이 되지 않으면 나도, 귀한 내 자식도 건강하게 일할 수 없다는 말이다.


(2017.7.7)




온도계 공장 취업 후 두 달 만에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15세 문송면군

낮에 일하고 밤에는 야간중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서울 영등포의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두 달 만에 수은중독에 걸렸다. 공장은 치료를 거부했고 정부는 공장 편을 들며 산재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그의 사연은 언론에 보도됐고 야당 정치인들이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산재를 인정받은 지 사흘 만인 1988년 7월2일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죽음은 산업재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꾼 계기가 됐다. 





원진레이온 노동자 800명 ‘독가스’ 중독 사태

1988년 인조비단실을 만드는 국영기업 원진레이온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쓰러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로 밝혀졌다. 1960년대 일본에서 수입한 중고기계에서 나온 독가스를 마신 노동자는 800명이 넘었다. 피해자들은 똘똘 뭉쳐 싸웠고 공장은 5년 후 문을 닫았다. 노사 합의를 통해 피해자 배상은 물론 직업병 전문병원과 연구소가 생기는 등 원진레이온은 국내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참혹한 산재로 희생된 산재 예방 활동가 49세 남현섭씨

한양대를 중퇴하고 산업 현장에 투신해 공장 일을 하다 25세이던 1992년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 네 개를 잃었다. 이후 자신의 산재보상과 재활치료를 도운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에서 15년 동안 산재노동자 권익운동을 했다. 뒤늦은 결혼으로 얻은 두 아이를 위해 다시 생업에 뛰어든 그는 2016년 3월 파쇄기에 상반신이 압착되는 사고로 49세를 일기로 숨졌다. 산재 예방 활동가마저 산재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참혹한 현실을 그의 죽음이 증명한다.




삼성 반도체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22세 황유미씨

고교 3학년이던 2003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가 3년 뒤 백혈병 판정을 받았고 이듬해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법원은 2011년 그의 죽음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가 있다며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택시 운전을 하던 아버지 황상기씨는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삼성을 상대로 10년째 싸우고 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결성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는 그동안 80여명의 또다른 삼성 직업병 사망 사례가 접수됐다.




에어컨 실외기 수리하다 추락사 한 하청업체 노동자 42세 진씨

2016년 6월 삼성전자서비스 하청업체 소속 애프터서비스(AS) 기사 진모씨(42)는 빌라 3층에서 안전장치 없이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다 난간과 함께 추락해 숨졌다. 바로 전 해에도 안산에서 LG전자 AS 직원이 에어컨 실외기 작업 도중 추락해 사망한 터였다. 동료들은 처리 건수만큼 돈을 받는 ‘건당 수수료’ 임금 체계와 위험한 업무를 하청 노동자에게 돌리는 문제를 지적했다. 석 달 뒤엔 인터넷 설치기사가 비오는 날 전신주 작업을 하다가 떨어져 숨졌다.





지하철역에서 생을 마감한 19세 청년노동자 김군

2016년 5월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노동자 김모씨(19)가 달려오던 전동차에 치여 숨졌다. 일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이었다. 2013년과 2015년에도 유사한 사망사고가 있었고, 이후 ‘2인1조 작업’ 등 안전수칙이 만들어졌지만 현장에선 지켜지지 않았다. 김씨가 계약직으로 일하던 하청업체는 원청인 서울메트로와 맺은 불리한 계약 탓에 인력 부족과 과도한 업무량 등 사고에 취약한 구조적 문제가 있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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