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나는 시대에 ‘희망과 탄생의 상징’을 세운 한 건축가의 소리 없는 저항 [이상한 책을 보았다]
ㆍ김중업 서산부인과 의원
ㆍ윤혜정·김원식 외 지음
ㆍ수류산방 | 400쪽 | 3만8000원

서울 을지로와 퇴계로가 만나는 곳, 삼각형 예각의 가장 모서리 땅에 자리한 흰색 건물이 있다. 둥근 곡선으로 이뤄진 외벽, 살짝 붙여 돌아가는 발코니의 외양. 서울에 불시착한 거대한 우주선 같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건물의 규모와 기세에도 눌리지 않고 50년째 자리를 지켜온 이 고고한 건물은 옛 ‘서산부인과 의원’ 건물이다.
오직 이 한 건물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인터뷰, 담론만을 엮어 낸 책 <김중업 서산부인과 의원: 근대를 뚫고 피어난 꽃>이 출간됐다. 한국 건축의 거장 김중업의 작품인 이 건물은 1966년 산부인과 건물로 지어졌다. 이 책은 단순히 이 건물의 건축학적인 측면만 다룬 것이 아니라 건물이 위치한 공간과 사회적 맥락까지 함께 담아내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서산부인과 의원이 들어선 곳은 조선시대 시신과 장례행렬이 지나가던 시구문인 광희문 앞이다. 광희문은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버려지고 매장된 성지의 출입구이기도 하다. 50여년 전 그 근방에는 빈민가와 시장, 화류가가 번갈아 생겨나고 없어졌다.

김중업은 “이 자그마한 병원은 강한 몸짓으로 눈길을 끈다. 삶에의 희열 또는 태어나는 새 삶에의 찬가를 부른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 건물에 대한 의미를 기록했다. 이 책은 김중업의 기록에 대해 “이 희망찬 문장은 눈물 나는 시대에, 척박한 땅에 상징적인 건물을 세우고자 한 어느 건축가의 소리 없는 저항에 가깝다”고 해설한다.
그 시대 산부인과는 근대화의 상징 같은 공간이었다. 산파나 조산사의 도움으로 집에서 아이를 낳던 여성들에게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혁명이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산부인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부인과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몰려 있었으며,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우월감의 상징이었다. 여성 잡지에는 유명 여배우가 쓴 ‘산부인과 분만 수기’ 같은 체험글들이 실릴 정도였다.
그러나 5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산부인과가 갖는 희소성과 상징성은 퇴색되어 갔고 건물도 함께 낡아갔다. 김중업의 다른 작품인 명보극장 등처럼 이 건물도 언제 제 모습을 잃어버릴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 놓여 있다. 현재 한 회사의 사옥으로 쓰이고 있는 이 건물은 2년 전 문화재 등록이 지정 예고됐지만 지금은 절차가 중단된 상태다.
이 책에는 서산부인과 의원의 기록 사진들과 설계도면, 당시 건축에 관여한 스태프와 건축주 가족의 인터뷰 등이 실려 있다. 건축가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근대사회와 서울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