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 된 베네수엘라-콜롬비아 국경...사이에 낀 주민들 (2021.4.6)
지난달 21일 새벽 콜롬비아 국경 인근에 위치한 베네수엘라 도시 라 빅토리아의 주민들은 트럭과 전투기 소리에 잠이 깼다.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몰려나간 주민들은 멀리 동쪽 하늘에서 폭탄이 터지는 불빛을 목격했다.
폭탄의 불빛은 하루하루 점점 더 마을 쪽으로 가까워졌다. 며칠 뒤 마을에 베네수엘라 군인들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콜롬비아 무장조직에 협력한 사람들을 색출하겠다며 사람들을 때리고 연행해 갔다. 한 주민은 무장조직을 도왔다는 의심을 산 부모, 형제, 삼촌 등 가족 4명이 군인들에게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고 휴먼라이츠워치에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군인과 폭격을 피해 앞다퉈 작은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 콜롬비아로 도망 치기 시작했다. 지난 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콜롬비아로 피난을 떠나 임시 난민촌에 머물고 있는 베네수엘라 주민들은 약 5000~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번 군사작전은 베네수엘라 국경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콜롬비아 옛 최대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펼쳐졌다. FARC는 2016년 콜롬비아 정부와의 평화협정 이후 공식 해체됐지만 일부 조직원은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국경 지역에 숨어서 마약밀매 등 범죄 행위를 이어왔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FARC가 먼저 라 빅토리아 인근에 있는 정부 시설과 군인들을 공격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는 “FARC의 공격 뒤에는 베네수엘라의 정권교체를 노리는 미국 CIA와 콜롬비아 정부가 있다”면서 “테러리스트들을 무장해제 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펼치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현지 매체인 ‘베네수엘라애널리시스’는 보도했다. 베네수엘라는 콜롬비아와의 국경 지역에서 보름째 이어지는 군과 무장조직의 충돌로 지금까지 자국 군인 8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마두로 대통령이 FARC 뒤에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도 반미 성향의 마두로가 아닌 후안 과이도 임시 정부를 베네수엘라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 것과 무관치 않다. 베네수엘라에선 2019년 1월 과이도 국회의장이 마두로 대통령의 독재에 반발하며 ‘임시 대통령’을 자처하고 나선 이후 벌써 2년 이상 ‘두 대통령’ 사태가 이어져 오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전날 콜롬비아 정부는 물론 국제사회가 나서 베네수엘라 국경을 침범한 마약 무장조직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국경에 설치한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유엔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콜롬비아 정부는 이번 군사작전이 FARC와 베네수엘라 정부의 마약밀매 사업 이권 다툼이라고 주장했다. 디에고 몰라노 콜롬비아 국방장관은 최근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베네수엘라의 군사작전은 국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약밀매 사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몇년 동안 FARC를 포함한 무장조직들이 베네수엘라 국경 안을 넘나들며 마약 밀매 활동을 하는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이들과 물밑에서 협력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 왔다. 이 때문에 콜롬비아 정부는 그동안 베네수엘라가 FARC 잔당을 비롯한 범죄조직에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비난해왔으나, 베네수엘라 정부는 그때마다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이번 군사작전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큰 문제는 최대 피해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베네수엘라 라 빅토리아 지역의 주민들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라 빅토리아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 ‘푼다레데스’의 후안 프란시스코 가르시아는 “폭격과 무력충돌이 날마다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면서 “이곳 주민들은 서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두 세력 사이에 갇힌 신세가 됐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양국의 60개 시민단체는 최근 공동 성명을 내고 “유엔이 특사를 지명해 분쟁을 중재하고 난민 캠프에 머물고 있는 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해달라”고 촉구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