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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르도안 ‘철권통치’ 심판당했다

정소군 2015. 6. 8. 00:13
ㆍ집권당, 단독 과반 실패… ‘쿠르드’ 사상 첫 원내 단독 진출
ㆍ에르도안 ‘대통령제 개헌’ 물건너가… 연정 실패 땐 재선거

 

환호하는 쿠르드인들 7일 치러진 터키 총선에서 쿠르드계 정당인 인민민주당(HDP)이 사상 첫 원내 진출에 성공하자 쿠르드인들이 밀집해 있는 남부 디야르바키르의 주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횃불을 손에 들고 V자를 그리며 환호하고 있다. 디야르바키르 _ AP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철권통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지난 7일 치러진 터키 총선에서 집권 정의개발당(AKP)이 13년 만에 처음으로 단독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그의 마지막 꿈이었던 대통령제 개헌이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현대판 술탄’ 에르도안을 무너뜨린 것은 쿠르드계 정당인 인민민주당(HDP)이었다.

터키에서 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던 쿠르드인들은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성소수자를 끌어안고 에르도안에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까지 규합함으로써 쿠르드 역사상 처음으로 원내 단독 진출에 성공했다.
 


터키 반관영 아나돌루 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AKP는 40.8%의 득표율을 얻어, 전체 의석 550석 가운데 258석을 차지했다. 1위를 하긴 했지만, 과반(276석)에는 18석이나 모자란다. 외신들은 “이번 총선 결과는 사실상 에르도안에 대한 심판”이라면서 “터키의 정치지형에 13년 만에 처음으로 커다란 변화가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에르도안이 창당한 AKP는 2002년 총선에서 첫 압승을 거둔 후 지난 13년 동안 이슬람 보수주의자와 농촌 지역의 압도적 지지를 업고 쉽게 과반 의석을 확보해 왔다. 지난해 8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에르도안은 자신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현행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전환하겠다면서 이를 이번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통령제 개헌을 위해서는 의석수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야 했지만, AKP는 이번에 과반을 얻는 데도 실패해 개헌은커녕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도 없게 됐다.
 

 

가디언은 “패배에 익숙하지 않은 에르도안이 어떻게 나올지가 가장 큰 관건”이라면서 “그가 언론과 반대 정치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설 것이란 소문도 떠돈다”고 말했다. 현재 모든 야당들은 AKP와의 연정을 거부하고 있다. 터키 법에 따르면, 연정 구성이 실패할 경우 대통령이 45일 후 다시 총선 실시를 선언해야 한다.


에르도안의 과반확보 실패는 쿠르드계 정당인 HDP가 12.9%를 득표하면서 약진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HDP는 2012년 창당 후 처음 치른 이번 총선에서 파란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터키의 대안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쿠르드계 정당으로 시작했지만, 터키 내 좌파진영을 결집시켰다. HDP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여성·성소수자·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거부한다. 실제 HDP는 이번 총선에서 공천권의 절반을 여성에게 할당하고 성소수자에게도 10%를 할당했다.
 
에르도안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HDP를 “게이 정당”이라고 비난하거나 쿠르드족 반군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의 관계를 부각시키면서 “테러리스트 정당”이라고 깎아내렸지만, 이들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HDP의 셀라하틴 데미르타시 공동대표는 원내진출이 확정된 후 기자회견에서 “자유를 원하는 모든 국민과 모든 억압받는 사람, 모든 노동자, 모든 여성, 모든 소수자들이 함께 승리했다”고 자축했다. 뛰어난 언변 덕분에 ‘쿠르드의 오바마’란 별명을 얻은 데미르타시 대표는 젊은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쿠르드족이 30년 동안 이어온 투쟁의 무대를 수도 앙카라로 옮기면서 자신들의 운동을 진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당선된 HDP 의원 중에는 종신형으로 복역 중인 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의 조카딸도 포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