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다윗’ 에르메스, 핸드백 전쟁에서 '골리앗' 루이비통을 이기다

국제뉴스

by 정소군 2014. 9. 8. 16:44

본문

명품업계의 ‘다윗’ 에르메스가 ‘거대 골리앗’인 모엣헤네시·루이비통(LVMH)의 인수합병 시도를 막아냈다. 

LVMH는 3일 발표한 성명에서 “LVMH는 현재 보유한 에르메스의 지분 대부분을 자사 주주들에게 배분해 분산하고, 향후 5년간 에르메스 지분을 매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에르메스는 LVMH에 제기한 법정 소송을 모두 취하하기로 했다. 외신들은 “에르메스가 LVMH와의 ‘핸드백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현재의 명품 브랜드 대부분은 약 180년전 가족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양장점이나 마구용품점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가족기업 형태를 버리고 주식회사에 인수합병되는 쪽을 택했다. 그 중에서도 LVMH는 끊임없는 합병을 통해 몸집을 부풀린 명품업계 최대의 골리앗으로 꼽힌다. LVMH가 수년간 눈독을 들여온 에르메스를 인수하는데 결국 실패하면서, 에르메스는 6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가족기업의 전통을 지킬 수 있게 됐다.


에르메스의 뚝심있는 고집 

오늘날 ‘명품 중의 명품’ 브랜드라 꼽히는 에르메스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프랑스 파리의 마들렌 광장에 낸 마구상에서 출발했다. 티에리가 만든 안장과 마구용품들은 그의 타고난 부지런함과 손재주 덕분에 금세 상류층 사회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마구상을 물려받은 에르메스의 아들 역시 아버지에게서 배운 노하우 덕분에 만국박람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명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에르메스는 첫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말과 마차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동차가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에르메스는 기민하게 변화를 꾀한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여행이 활성화될 것임을 예견하고 주상품을 마구에서 여행가방으로 바꾼 것이다. 

1880년에 연 파리의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 에르메스 매장


에르메스의 생명력은 유연한 시장 대처능력이었다. 미국에서 개발된 지퍼 잠금장치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가방 디자인과 접목시켰고, 2차 대전으로 염료가 부족해지자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던 오렌지색을 과감하게 핸드백에 사용했다. 우연히 비행기에 동승하게 된 영국 영화배우 제인 버킨이 “가방에 주머니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말하자 즉시 버킨에게 디자인을 맡겨 그 유명한 ‘버킨백’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버킨백


하지만 그런 에르메스가 유일하게 시장의 흐름과 거꾸로 고집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가족기업’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생산 방식이었다. 1970년대 새로운 라이벌 기업들이 가격이 싼 인조 신소재 가방들을 대량생산해 내면서 에르메스는 경영난으로 잠시 사업을 중단하는 위기를 겪게 됐지만, 자신만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고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지금도 에르메스는 장인 한명이 엄격한 품질 검사를 거친 최고급 가죽으로 18시간 동안 오직 수작업만으로 가방을 만들어 낸다. 가방이 완성된 이후에도 장인이 은퇴하기 전까지 책임지고 그 가방의 수선을 전담한다. 이 때문에 지금도 에르메스 가방은 한해에 만들어지는 갯수가 한정돼 있어서 구입하려면 대기표 명단까지 받아들고 기다려야 할 정도다. 

LVMH의 공격적인 수완

반면 LVMH는 에르메스와 시작은 같았지만 정 반대의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그룹의 모태인 루이비통은 1854년 파리에서 여행가방 상점으로 출발했다. 나폴레옹 3세 때 궁정의 짐 꾸리는 일을 맡았던 루이 비통은 상류층의 비싼 의상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잘 운반할 수 있는 노하우를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나무 트렁크가 아닌 캔버스로 만든 튼튼한 사각형 여행가방을 개발해 냈다. 루이 비통의 가방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사업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이 모조품을 막기 위해 고안해 낸 모노그램은 루이 비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로고로 자리잡았다.

루이 비통의 첫 번째 공방.


2차 대전 이후 여행의 수단이 기차에서 자동차로 바뀌자 루이비통은 트렁크보다 더 작고 실용적인 가방 개발에 주력해 빠삐용백, 에삐라인 등을 만들어 냈다. 1978년부터 일본과 태국, 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매장을 개장했다.
 

그러나 루이비통은 가족 경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1984년 뉴욕과 파리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등 변화를 꾀하기도 했으나 결국 1987년 샴페인과 코냑 제조업체인 모에 헤네시에 합병되는 쪽을 택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명품 사냥꾼’이란 별명을 가진 베르나르 아르도가 세운 거대 럭셔리 기업, LVMH 그룹이다. 

LVMH의 브랜드들


LVMH는 ‘한정품’이란 희소성으로 명품의 가치를 높인 에르메스와 정 반대로 ‘명품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루이비통의 한해 매출은 어림잡아 20조원으로 추산된다. 200만원짜리 가방이라고 하면 1000만개에 이른다. 아르노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LVMH는 디올, 펜디, 셀린느, 불가리, 겔랑, 지방시 등 내로라 하는 프랑스의 유명 명품 브랜드들을 엄청난 속도로 인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LVMH에 속해 있는 브랜드는 60여개에 달한다. 프랑스가 세계 명품 시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 프랑스 명품시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 것이 바로 LVMH이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명품 사냥’에 나선 LVMH가 오랫동안 가장 탐내 왔던 것이 바로 에르메스였다. LVMH와 에르메스 사이의 이른바 ‘핸드백 전쟁’은 2010년 10월 LVMH가 에르메스의 지분을 17.1%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LVMH는 그 후에도 계속 에르메스의 지분을 야금야금 사들여 현재 에르메스 가문이 보유한 지분(73.4%)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 

에르메스는 LVMH가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에르메스는 2012년 9월 LVMH가 자사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 내부자 거래 등 불법행위를 동원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지분 방어에 주력하기 위해 기존 전문 경영인 체제에서 다시 가족 경영체제로 복귀했다. 


LVMH는 “단순한 투자목적일 뿐 적대적 인수합병 의도는 없다”고 부인했지만, 시장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해 프랑스 시장규제위원회(AMF)는 LVMH가 에르메스 주식을 매입하기 이전에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시장을 교란시켰다며 800만유로(약 107억원)의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연 매출이 253억유로에 달하는 LVMH와 38억유로 수준인 에르메스의 인수합병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여겨져 왔다. 

이번에 두 회사가 4년여만에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에르메스는 인수합병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번 합의에 따라 LVMH는 지주회사인 ‘그룹 아르노’에만 에르메스 지분 8.5%를 남겨두고 나머지 지분을 오는 12월20일 이전까지 자사 주주들에게 배분해야 한다. LVMH 주주들은 LVMH 주식 21주당 에르메스 주식 1주를 받게 된다. 

에르메스가 LVMH에 인수될 경우 에르메스 고유의 고전적인 가치가 희석될 것을 우려한 에르메스의 골수팬들에게는 희소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