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의 ‘새 판’을 짜기 위해 국제 채권단과 팽팽한 기싸움을 벌여오던 그리스가 일단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그리스는 지난 20일 유로존 국가들과 현행 구제금융을 4개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그리스는 새 협상 타결까지 유동성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이날 합의에 따라 그리스는 23일까지 재무건전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개혁 정책안을 마련해 채권단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스가 제출할 개혁안에는 탈세와 부패 척결, 공공행정 투명화 등의 조치가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합의 도출로 시간벌기 성공
이전까지는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으로 구성된 채권단 ‘트로이카’가 요구하는 지원 조건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했지만, 이번 합의안은 그리스가 스스로 개혁안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다만 채권국들은 그리스의 개혁안이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만 4월 말에 구제금융 분할지원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21일 현지 TV에 출연해 “우리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긴축을 끝내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진짜 어려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이번 합의안이 ‘긴축 절대 불가’를 주장하는 당내 강경 좌파의 반대에 부딪힐 것으로 전망했다. 사실상 채권단의 요구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경우 구제금융을 계속 이행해야 하는 데 실망한 유권자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그리스 신민당 출신인 게오르기오스 키르조스 유럽의회 의원은 가디언 일요판 옵서버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 정부는 당장 4개월이란 시간을 벌었지만 시한폭탄은 터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시리자 ‘공포전술’ 불식 성과
그러나 속단하긴 이르다. 이번 합의안 도출을 통해 시리자가 주요 채권국들과 주류 언론의 과장된 ‘공포 전술’을 불식시켰다는 것은 의미 있는 성과 중 하나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우리가 당선되기도 전부터 사람들은 시리자가 집권하면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이 일어나고 그리스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어왔다”면서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러한 유언비어에 종말을 선포했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통신은 “그리스는 이번 합의안에서 긴축재정 목표치를 낮추고 세금 인상·연금 축소 등의 조건을 중단시키는 성과를 거뒀다”고 평했다.
그리스 현지 매체인 카티메리니는 “그리스와 유로는 어차피 같은 배를 탄 운명”이라며 “지금은 서로 분열하기보다 솔로몬의 지혜를 짜내야 할 때”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