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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도시]공동체 은행·지역화폐 18년, 슬럼이 지속가능한 마을로… 제도 은행 문턱에 막힌 이들에게 0~3% 저금리 창업 대출

도시

by 정소군 2015. 4. 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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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9) 브라질 포르탈레자 ‘기적의 은행’

 

 브라질 북동부 포르탈레자는 해안 관광도시이다. 백사장과 야자수가 해마다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을 유혹한다. 바닷가 파라솔 뒤에는 최신식 호텔 건물이 즐비하다. 빈민들이 만든 ‘기적의 은행’ 파우마스는 이 해안에서 내륙으로 23㎞ 떨어진 마을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에 있다.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고 콘준토 파우메이라스로 가는 사이, 창밖의 풍경은 어느 순간 허름한 벽돌집과 공터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차창 뒤를 돌아보니 해안 끄트머리에 병풍처럼 늘어선 빌딩숲이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해안과 이곳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버스는 황량한 마을 한 복판에 멈췄다. 풍족한 것이라곤 뜨거운 햇살 밖에 없는 듯했다. 한 시간 전 바라본 바닷가와 이 마을이 같은 도시에 속한 곳이 맞을까. 노란 2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외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누구도 가난을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다. 변두리 은행,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은행이야!’ 인구 3만명의 빈민촌을 세계가 주목하게 만든 파우마스 은행이었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 마을 전경.


■버림받은 자들의 마을 ‘콘준토 파우메이라스’
 도시 개발은 종종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한다. 빌딩을 짓고 도로를 놓는 일은 원래 그곳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는 도시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다. 주민 대부분은 1970년대 초까지 해안에 살던 가난한 어부들이었다. 정부가 이곳이 가진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시 당국은 1973년 이 지역의 파벨라도스(슬럼 주민을 지칭하는 경멸적 용어)를 교외로 강제 이주시키는 도시개발을 시작했다. 하루 아침에 추방된 원주민들은 포르탈레자 교외의 습지와 공터를 할당받았다. 전기와 수도, 대중교통은 물론 집도, 학교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1973~81년 내륙 농촌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마을 인구는 빠르게 늘었다. 깨끗한 거리와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에 취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스스로 뭉쳐야 했다. ‘누구도 가난을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1981년 ‘콘준토 파우메이라스 주민연합(ASMOCONP)’이라는 주민회를 조직했다. 진보적인 가톨릭 교회와 국제 비정부기구(NGO)들도 돕기 시작했다. 주민연합의 1차 목표는 수도, 전력, 도로 등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시 정부를 압박해 예산을 따오고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아 더디지만 조금씩 마을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학교를 지을 벽돌을 날랐다. 주민연합이 조직된 후 7년이 지난 1988년, 처음으로 마을에 수도가 놓였다. 20년이 지난 1990년대 말에는 파벨라(슬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어려움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마을이 도시의 꼴을 갖추자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에서조차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의 90%는 가구당 소득이 하루 7달러 미만인 빈곤층이었으며 75%는 문맹이었다. 인프라가 갖춰진지 1년 만에 가옥세와 토지세, 수도료를 낼 수 없는 주민 30%가 이곳을 떠났다. 1997년 주민연합은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의 고민은 16년전 출범할 때와 똑같았다. “우리 모두가 이 마을에서 계속 함께 살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질문은 또다른 질문을 낳았다. “우리는 도대체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돈이 없었고, 그나마 번 돈의 대부분을 마을 밖에서 썼다. 여전히 마을은 경제의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는 ‘껍데기’였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은행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지역 단체가 기증한 2000헤알의 기부금을 가지고 시작한 이 공동체 은행은 마을 내 생산과 소비의 불쏘시개가 돼주기 위해 태어났다.


 

■지역화폐 ‘파우마’를 체험하다


 지난 2월2일 파우마스 은행을 방문한 취재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라질 화폐 ‘헤알’을 파우마스 은행이 발행하는 지역화폐 ‘파우마’로 바꾼 것이었다. 50헤알(약 1만7000원)을 건네니 50파우마가 돌아왔다. 헤알과 1대1로 교환되는 파우마는 파우마스 은행과 계약한 마을 안 상점에서만 통용된다. 파우마를 다시 헤알로 바꿀 때에는 2%의 관리비용을 공제한다.

 

헤알화, 파우마로 교환하는 주민들 지난 2월2일 파우마스 은행 직원(오른쪽)이 브라질 공식 화폐인 헤알화를 파우마스 은행이 발행하는 지역화폐인 ‘파우마’로 교환해주고 있다. 파우마와 헤알은 1 대 1로 교환되며 파우마스 은행과 계약한 마을 내 상점에서만 통용된다.


   처음에는 종이로 카드를 만들어 5개 상점에서 소꿉장난처럼 출발했던 것이 지금은 주유소, 약국, 마트 등 240여개의 상점으로 확대됐다. 파우마가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은행의 산파 역할을 맡았던 조아킴 지 멜루의 신망 덕분이었다. 가톨릭 사제로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그는 1980년대 주민연합에 합류했다. 멜루는 “1997년 당시 주민들이 쓰는 돈의 80%는 마을 밖에서 소비되고 있었다”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총생산량보다 ‘돈의 흐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의 첫번째 목표는 사람들이 마을 안에서 돈을 쓰도록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상인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멜루를 비롯한 주민연합 원로들이 상인들을 직접 설득하러 다녔다. 파우마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유인책도 마련했다. 멜루는 “파우마가 정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주민연합의 성과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였다”고 말했다. 그 신뢰가 은행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은행을 살리고 마을을 발전시키자는 것에 모두가 자발적으로 동참했다”고 말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주인에게 “파우마로 계산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얼마든지 된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마트 중 한 곳의 매니저인 엘리스 안젤라(37)는 “우리는 파우마와 헤알을 전혀 차별하지 않는다”면서 “벌어들인 파우마로는 파우마스 은행에 전기요금과 세금을 내는데 쓴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파우마를 받았지만 이제는 받지 않는다는 가게들도 있다. 조아킴은 “파우마 사용율이 초기보다 많이 줄어든 것은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파우마는 마을 내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한 도구였으며 그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말했다. 실제 1997년 20%에 불과했던 지역 내 소비 비중은 2011년 93%로까지 증가했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의 한 마트 직원이 지역화폐인 ‘파우마’로 물건값을 받고 있다.


 

■파우마스 은행이 그리는 소비와 생산의 지도


 

 파우마스는 은행의 역할을 넘어 마을 경제공동체를 아우르는 ‘기획재정부’ 역할을 담당한다. 마을 청년들을 고용해 2년마다 한번씩 지역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품의 종류와 양, 지역 주민들의 씀씀이와 소비내용을 조사해 ‘소비·생산지도’를 그리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 지도는 파우마스 은행이 주민들에게 창업 대출을 하고 직업교육을 할 때 소중한 자료로 쓰인다. 멜루는 “가난한 마을이 함께 잘 살려면 경제적 연대가 필수적”이라면서 “누군가 이미 있는 가게보다 더 크고 좋은 가게를 내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우마스 은행은 제도권 은행의 문턱을 넘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0~3%의 낮은 금리로 창업 대출을 해준다. 이 때 ‘소비·생산지도’를 바탕으로 이들의 창업계획을 검토한 후 기존 사업과 중복되면 업종을 바꾸도록 설득한다. 한국에서처럼 이미 포화상태인 치킨가게를 열고 싶다고 대출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목 좋은 곳에 더 크고 좋은 인테리어를 갖춘 치킨가게를 열라”고 하기 보다는, 치킨 포장박스를 생산하는 창업을 권유해 상생할 수 있도록 조율해 주는 것이다.


 일례로 파우마스 은행은 지역 청년들이 컴퓨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다른 지역까지 힘들게 버스를 갈아타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콘훈토 파우메이라스에는 컴퓨터 기술 학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행 측은 지역 내 한 슈퍼마켓 사장을 찾아가 컴퓨터 관련 분야로 업종을 확장하라고 권유했다. 이미 마을에 슈퍼마켓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슈퍼마켓 사장은 지금 성공적인 컴퓨터 학원 매니저가 됐다. 이처럼 세심한 업종 선택과 직업교육을 병행한 덕분에 파우마스 은행의 대출 상환율은 93%에 달한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 청년들이 파우마스 은행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다.


  파우마스 은행에서 우베란디아(35)라는 주부를 만났다. 버스운전사인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아이들 교육비를 부담할 수 없는데, 우베란디아가 중졸 학력으로 찾을 수 있는 일거리는 흔치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은 정말 중요하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미리 돈을 모아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의 대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애당초 서류심사 자격이 되지 않았고, 이자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파우마스 은행 대출 광고를 봤다. 파우마스는 기꺼이 4000헤알을 빌려줬다. 파우마스는 마을 경제규모가 커지고 창업 업종이 다양해지면서 최근에는 헤알화로도 대출을 해준다.


 우베란디아는 그 돈으로 향수가게를 열었다. 4년 만에 대출금을 모두 갚고 1000헤알을 저축했다. 지금은 향수가게를 정리하고 파우마스 은행에서 여성 창업자들을 위해 운영 중인 회계 수업을 듣고 있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후 유명 제과 체인점을 열기 위해서다. 새 사업을 위한 대출 상담을 받던 그는 “파우마스 대출로 사업을 한 뒤 내가 얻은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다. 내 자신이 ‘강한 여자’라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우베란디아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콘훈토 파우메이라스의 인상이 어땠냐”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왔다. 해변과 너무 큰 격차가 느껴졌다고 솔직히 답하자, 그는 “맞다. 우리 마을은 더 많이 발전해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내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 우리 마을에 슈퍼마켓이 얼마나 많은지 봤느냐. 이전에는 구멍가게도 없던 곳이었다. 지금 우리 마을에 학교가 얼마나 많은지도 확인했느냐. 그건 아이들이 많다는 뜻이고 그만큼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는 의미다.”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는 가난을 힘을 합해 이겨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었다.

 

[도전하는 도시] “언제든 돈 빌릴 곳 있다는 건 큰 위안”

 

 

 

 

 콘훈토 파우메이라스의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직원에게 “콘훈토 파우메이라스 주민연합 회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분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직원은 흔쾌히 두 블럭 떨어진 곳까지 안내해줬다. 찾아간 곳은 마리아 데 루르데스(67)의 집이었다. 파우마스 은행에서 배운 봉제기술로 인형을 만들어 파는 루르데스는 이 날도 집 한 쪽 작업실에서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해변 마을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루르데스는 1980년 이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 허허벌판 위에 천막을 치고 살아야 했다. “우리는 그때 정부로부터 내팽겨쳐졌다.” 물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하루하루 버티다가 주민연합 가입을 권고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글을 모르는 주민들을 위해 주민연합이 무엇인지 길거리 연극과 라디오 방송으로 알리고 있었다. 회원이 되려면 매달 3헤알(약 1020원) 정도를 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마친 후 삯바느질로 살아온 그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어떤 이들은 “말만 번드르르하고 돈만 뜯어 갈 것”이라며 말렸으나 루르데스는 망설임 없이 가입했다. “그때 우리는 누구라도 좋으니 도움이 절실했다. 나부터 참여해야 지역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을에 전기와 수도가 놓이고, 푼푼이 모은 돈으로 벽돌집을 지었다. 그래도 여전히 가난했다. 1997년 파우마스 은행이 설립되자 누구보다 먼저 은행의 봉제기술 강좌를 들었다. 전문 기술을 배우자 삯바느질보다 훨씬 벌이가 좋은 옷이나 인형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무이자 대출을 받아 원단을 사서 인형을 만들었다. 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파우마스 은행으로 달려갔고, 그때마다 은행은 100~300헤알을 빌려줬다”면서 “언제든 돈을 빌릴 보루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위안과 의지가 됐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파우마스 봉제기술학교 자문위원이 되어 자신이 배운 것을 주민들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월회비가 아깝다며 만류하던 이들도 지금은 똑같이 주민연합이 이뤄낸 지역발전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불공평하게 느껴진 적은 없냐고 묻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이미 내가 낸 회비보다 더 큰 것을 돌려받았다. 내 회비가 모두가 잘 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면 그것이 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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