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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줄’에 숨 막히는 유럽 민주주의

국제뉴스/유럽과 러시아

by 정소군 2015. 4. 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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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와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유럽중앙은행·유럽연합집행위)의 구제금융 협상이 ‘치킨게임’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트로이카가 오는 24일 협상에서 구제금융 분할금 72억유로(약 8조4000억원) 지원을 끝내 거부할 경우 그리스는 오는 5~6월 중 국가부도가 날 가능성이 높다. 당장 이달 말까지 밀린 임금과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24억유로가 필요한데다, 5월 중 국제통화기금(IMF)에 9억7000만유로의 채무를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트로이카는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까지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는 발언으로 그리스를 압박하고 있다.


 갈수록 꼬여가는 그리스 사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돈도 못 갚았으면서 채권자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그리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사태는 단순히 돈 문제로만 바라봐선 안된다. 사실상 ‘트로이카의 식민지’가 된 그리스는 유럽의 민주주의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1999년 유로존 출범 당시 유럽중앙은행(ECB)의 역할은 통화정책에만 국한돼 있었다. 재정·금융정책은 각국 정부의

재량에 맡겼다. 그러나 2010년 그리스 위기가 터지자 원칙이 무너졌다. 트로이카는 그리스의 채무불이행을 막기 위해 구제금융 금지를 규정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긴급 수정했다. 그리고 그리스에 2460억유로의 구제금융 자금을 빌려줬다.


 필립 리그랭 전 유럽연합(EU)집행위 자문위원은 “당시 트로이카는 ‘유럽경제공동체의 연대’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리스에 돈을 빌려준 독일과 프랑스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실제 구제금융 자금 대부분은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에 진 빚을 갚는데 쓰였고, 그리스 국민을 위해 쓴 금액은 150억유로에 불과하다고 미 정치웹진 ‘카운터펀치’가 분석한 바 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돈을 빌린 쪽 못지 않게 빌려준 쪽도 책임을 져야 했지만, (트로이카 덕분에) 은행들만이 책임에서 면제됐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트로이카는 무슨 권한으로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저서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에서 “EU는 구조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이 결여돼 있어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심각한 결함을 노출한다”면서 “이 때문에 금융위기가 닥치자 합법성이 없는 트로이카가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트로이카조차 무엇을 합의하든 간에 현재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메르켈과 트로이카는 그리스 구제금융을 위해 다른 유럽 국민들의 혈세를 동원했고, 이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결국 해당 국가에 강력한 긴축정책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결과적으로 모든 민간 부채의 책임을 그리스 국민의 공적 부담으로 전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EU 집행위는 지난 1월 급진좌파정당인 시리자가 집권하자 “그리스의 선거 결과가 트로이카의 정책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울리히 벡은 저서 <경제위기의 정치학>에서 “지금 유럽에서는 오직 부자나라 국민들만 투표권을 가지고 가난한 채무국은 식민주의로 전락하는 봉건주의 시절 귀족들의 특권이 부활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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