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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아파트 37년, '역사 속으로'

도시

by 정소군 2006. 4. 1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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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꼬불 끝없이 이어지는 고갯길. 숨이 턱에 찼다. 머리를 에워싼 건 남산타워와 힐튼호텔의 낯익은 스카이라인. 분명 익숙한 곳인데도, 이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시민아파트? 저리로 꺾어져서 좀만 더 올라가면 돼야. 뭐 볼꺼 있다고 찾아오는지….” 비탈길 구멍가게 앞에 앉아 뻐끔담배를 피우던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쪼글쪼글 할머니의 주름진 너털웃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시민아파트의 안내자로 그만큼 어울리는 자가 또 있을까.

 

 


‘마지막 남은 시민아파트의 마지막.’ 1970년 전후 우후죽순 지어졌던 시민아파트 434동 중 이제 남은 것은 이곳 회현 제2시민아파트, 딱 1동뿐이다. 올 가을, 이곳마저 철거되고 나면 시민아파트의 역사는 영원한 종말을 선언하게 된다.

#철거민, 연예인, PD, 중앙정보요원들의 이상한 동거

1970년 완공된 이곳은 온갖 계층이 뒤섞여 산 독특한 공간이었다. 철거민과 연예인, 방송국 PD와 중앙정보부 요원 등이 한 단지 안에 모인 이상한 동거.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지만, 당시로선 최초의 중앙난방식 아파트라 정작 상류층이 자리를 메운 탓이다.

철저히 계층지향적으로 아파트가 지어지는 지금에 와서 보자면, 있을 수 없는 4차원의 공간인 셈이다. 한 집에선 전기세를 못내 촛불을 켜고 살았지만, 그 옆집에선 부잣집 유한마담들이 온수 목욕을 즐겼던 어울리지 않는 풍경. 서청원 의원, 은방울자매, 가수 윤수일씨 등이 이곳을 거쳐간 유명인들이다.

“철거민들이 돈이 있나. 판자촌 출신은 30%도 안될걸. 그땐 돈내는 순서대로 입주권이 주어졌는데, 부자들이 떼로 몰려와서 아침 일찍부터 줄서서 서로 먼저 내겠다고 아우성이었지.”

주민 윤태성씨(56)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이곳의 산 증인이다. 6·25 이후 남대문 시장에서 주워온 생선박스로 집을 만들어 남산 중턱에 정착했던 그의 가족은, 정부가 판잣집들을 헐고 시민아파트를 세울 때 입주금 30만원, 15년 거치 매달 2,000원씩 갚아나간다는 조건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KBS가 남산에 있던 시절이라 PD,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지. 어디 그뿐인가. 온수가 나오니까 화류계 유한마담들도 많았고, 남산 근처에 시각장애인협의회가 있었던 때문인지 시각장애인들도 꽤 살았어.”

아파트 입구의 팻말엔 정작 ‘시민아파트’란 말 대신 ‘회현 제2시범아파트’라고 쓰여있다. 당시 시장이 “앞으로 모든 아파트는 이곳을 ‘시범’삼아 튼튼히 지으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했다.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직후라 특별히 신경써서 지은 덕분이다.

“그런데 사실 이게 무허가투성이야. 소방재청 허가가 안나서 그걸 무마하려고 19호 라인은 경찰에, 그 옆 라인은 중앙정보부에 헌납했단 소문이 파다했었지.” 윤씨가 들은 소문처럼 이곳엔 경찰도, 중앙정보부 직원도 유독 많이 살았다.

그러나 1978년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비싼 중앙난방비 때문에 인기가 시들해졌고, 고급 신식 아파트가 여의도 등지에 많이 지어지자 회현 시민아파트는 순수한 서민들만의 보금자리로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손때묻은 아파트 켜켜이 추억만 남아

그리고 2006년, 철거일까지 6개월여 남은 지금. 계단은 닳고 닳았으며, 복도는 어두침침, 나무 현관문은 심하게 삐걱댄다.

10층짜리 아파트지만 이곳엔 엘리베이터가 없다. ‘구루마’를 끌며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할머니와 우연히 마주쳤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건어물 아줌마’ 김영열씨(68)였다. “은방울자매는 7층에 살았고, 탤런트 배영남씨는 1층에 살았고, 또 어디 보자….” 36년 동안 이 아파트에서 건어물 ‘방문판매’를 해온 아줌마는 지금도 그 옛날 호수까지 줄줄이 외운다.

그가 물건 파는 방법은, 그냥 문 열고 들어가기. “여긴 다 문 열어 놓고 살아. 나도 이젠 가족 같은 존재니까 그냥 문 열고 들어가도 ‘저 아줌마 또 왔네’ 하고 마는 거지, 뭐.” 이제 얼마 안있으면 그가 정붙여온 오랜 터전도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다.

‘마지막’이란 이유만으로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줄을 지어 찾는 이곳이지만, 사실 주민들에겐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화장실이 어찌나 잘 막히는지 만날 그거 뚫는 게 일이에요. 3~4년 전까지도 100볼트 콘센트여서 냉장고·TV 하나하나 트랜지스터를 따로 달아줘야 했다니까.”

그러나 시어머니 흉보듯 구구절절 흠을 잡던 주민 김경욱씨(39·여)도 끝내 아쉬움을 감추진 못했다. “그래도 분위기 하난 좋았지. 비오면 빈대떡 부쳐서 나눠먹고, 봄이면 남산에 벚꽃놀이 가고. 할머니들은 꼭 시골마냥 공터에 장독대 묻어놓고 말이죠. 사람들이 아파트 없어져도 같은 동네에서 또 이렇게 모여 살자고 하네요.”

수위실은 마치 시골버스 대합실 같다. 할머니들은 늘어지게 앉아 수다를 떨고, 높은 고개 오르느라 지친 주민은 수위실에서 물 한모금 마시고, 꼬마들은 엄마가 맡기고간 열쇠를 찾느라 부산을 떤다.

수위 홍하표씨(70)는 1970년 완공후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곳의 수호를 자처해온 터주대감. 하수도가 막히거나 문고리가 고장나서 SOS 요청이 들어오면 언제나 그가 출동한다. “여기서 이렇게 평생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숙직하면 야참 사서 건네주고, 이사간 후에도 수위실로 안부전화 해주고…. 그런 정이 있으니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일했나.” 홍씨를 비롯한 관리실 직원들은 5월쯤 ‘마을잔치’를 열 예정이다. 헤어지기 전 모두가 함께하는 마지막 축제로 아쉬움을 달래고 싶어서다.

수위실에 앉아있던 강옥남 할머니(86)는 신문사에서 왔다니까 몇번이나 재차 신신당부를 했다. “나 대신 구청장님한테 부탁 좀 해줘. 나 죽기 전까진 여기 헐지 말아달라고, 나 기냥 여기서 죽게 해줘. 여기 입주금 마련하느라 밀가루만 먹고 살았었어. 그렇게 내 평생이 서린 집이여. 응?”

누군가에겐 도심속 흉물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겐 평생의 터전이었던 곳. 세월은 아파트를 갉아먹었지만, 사람들의 정은 세월이 지날수록 깊어만 졌다. 아파트는 헐려도, 이곳에서 내집 마련의 꿈을 키웠던 가난한 서민들의 추억은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지금 회현 시민아파트 앞 남산엔 이곳에서의 마지막 봄을 축복이라도 하려는 듯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글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사진 김영민기자 viola@kyunghyang.com

 

시민 아파트의 탄생과 뒷이야기

“무허가 건물의 발생을 억제하라. 무허가 건물 정리를 서둘러라.”

시민아파트의 탄생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서 시작됐다. 1966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의 무허가 건물은 13만6천6백50동.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은 6·25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채, 두채이던 것이 옆으로 번지면서 마침내 온 산허리와 하천가를 뒤덮었다. 특히 남산이나 용산 일대엔 남대문 시장 등지에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의 판자촌으로 바글거렸다.

 

김시장은 9만채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한 후, 69년부터 3년간 총 2,000동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해 영세민 9만가구에 ‘내집마련’을 안겨주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당시 시청 현관에 내걸렸던 시정구호들은 다음과 같았다. ‘선택+준비+실천+집념+증거… 시민 위한 아파트 2,000동, 4백50만 우리의 용기이다. 훈장이다. 의욕수(意慾數)를 과시하자.’

69년도의 시민아파트 건설사업 기공식은 당시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됐다. 어찌나 지나치게 의욕이 성급했던지 그해 5월15일 하루에만 열린 기공식이 모두 16군데였다. 시장과 부시장 등이 지구별로 차례대로 나누어 참석한 기공삽질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모두 끝났다고 한다.

시민아파트 기공 첫해동안 건립된 아파트는 모두 406동, 1만5천8백40가구. 아파트는 모두 산 중턱에 지어졌다. 1호 시민아파트인 서대문의 금화아파트는 무려 해발 203m의 금화산 위에 지은 것이었다. 한 서울시 간부가 “공사하기도 힘들고 입주자들도 힘들 텐데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지어야 합니까”라고 묻자 김시장은 “이 바보들아.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 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시장의 이 말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실제 시민아파트들은 고층건물이 거의 없던 시대에 박대통령이 승용차로 시내를 순회한다면 차창 밖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여기엔 몇가지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설 부지의 지질검사 같은 것은 애초에 실시조차 되지 않았다. ‘산허리니까 모두 튼튼한 화강암 지질이겠거니’하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이다.

또 애초의 취지와 달리 엉뚱한 사람들이 입주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당시 무허가 판자촌의 주민들은 하루벌어 하루먹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가재도구 따위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입주권 매매는 금지되어 있으니 그것을 믿고 무게지탱 능력이 취약한 구조로 아파트를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입주권은 실제 공공연하게 매매됐고, 실입주자는 거의가 장롱·피아노에 쌀 한가마니, 연탄 100장씩을 들여놓는 중산층이었다. 그러니 시민아파트가 그 무게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을밖에.

70년 4월8일, 급기야 마포 와우아파트가 갑자기 폭삭 무너져내리는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33명 사망, 40명 부상이라는 참극이 빚어졌다. 이후 박대통령은 시민아파트 계획을 전면 백지화할 것을 지시한다.

77년말, 서울시 주택관리과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71~77년 사이 모두 101동의 시민아파트가 철거되었고, 철거에 소요된 비용은 총 50억7백만원. 이는 437개동 건립비에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97년, ‘시민아파트 5개년 정리계획’에 따라 남은 시민아파트들도 본격적으로 철거되기 시작해, 현재 회현 제2시민아파트 한개만을 남겨놓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시는 시민아파트 철거부지를 공원이나 주차장 등 공공용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렇게 시민아파트는 아이러니한 과거의 한 단면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예정이다.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자료출처 〈한국도시 60년의 이야기〉 〈서울육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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