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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2년 후에도 이 집에서 겨울을 날 수 있을까

칼럼

by 정소군 2017. 8. 1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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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고흐는 37세 때 죽었고, 평생 37번 이사를 했다.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침실’은 그가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갖게 됐을 때 감격에 겨워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불운한 천재화가의 비극적인 삶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 나이 숫자만큼이나 이사를 다녔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된 듯한 느낌이 든 것은, 아마도 내가 소득 수준 대비 주거비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대한민국 서울시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의 <침실>


넉달 전, 나는 뼈아픈 실수를 했다.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대로 전세 보증금을 올려주지 않은 것이다. 2년 전보다 전세 보증금을 무려 50% 가까이 올리자 ‘이런 도둑놈’이라고 생각했다. ‘어디 집이 나가나보자’며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뀌었건만, 이럴 수가. 주인이 집을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놓자마자 나가버렸다.


 그제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부동산 중개업소 순례를 시작했는데, 아예 전세매물 자체가 없다면서 연락처만 남기고 가란다. 한 직거래 사이트에서 나에게 딱 좋은 가격의 집을 기적처럼 발견하고 구두계약까지 갔지만, 그것마저 결국 파투가 났다. 직장이 멀어져 이사를 가려고 했던 그 집 세입자도 전셋집을 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거리 출퇴근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집에서 계속 살겠다고 했다.


 매일 점심때마다 식음을 전폐하고 중개업소에 출근도장을 찍으러 갔다. 나처럼 다급한 사람이 많았는지, 중개업소 유리문에 달린 종은 평일 낮시간에도 쉴새없이 딸랑거리곤 했다. 할머니와 마주친 건 그 중개업소에서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홀로 들어온 할머니는 혼자 살 작은 방을 구한다고 조그맣게 말했다. 중개업소 직원이 물었다. “얼마짜리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얼마짜리가 있는지 먼저 말해줘….” 할머니는 액수를 말하지 않았다. “집값이 천차만별이라서 가지고 계신 돈을 말해주셔야 해요!” 직원이 답답해서 다시 물었다. “크고 좋은 집 말고 나 혼자 살 집 말이야. 애들은 딴 데 살고, 나 혼자 살 방 하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 액수를 끝까지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은 그 할머니의 자존심이었을까.


 방 하나짜리는 없고, 요새는 반지하 전세도 7000만원 가까이 한다는 직원의 말에 할머니는 “너무 비싸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손님이 계속 몰려들자 바빠진 직원들은 더 이상 할머니를 상대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는 그곳에서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있다가 조용히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전세 대란’이 일으킨 잔인한 연쇄효과의 마지막 단계를 목격하고 있구나! 치솟는 전셋값 때문에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빌라로, 빌라에서 다세대로, 다세대에서 반지하로 밀려난다. 그렇다면 대출조차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그 다음 어디로 밀려나야 하나.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후보 시절 세입자들의 목돈 부담을 덜어주고, 하우스푸어의 대출 부담을 해소해주는 동시에 임대주택 공급을 늘리겠다는 부동산 공약을 내놓았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집값 상승액은 국내총생산(GDP) 증가액의 3.5배에 달했다. 주택 시가총액이 781조원 증가한 데 반해 GDP는 223조원 늘어나는 데 그친 것이다.


 집 없는 설움이란 단순히 벽에 못을 박을 수 없다거나, 집값 상승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따위가 아니다. 2년마다 물 위에 뜬 부초처럼 이리저리 떠밀려 다녀야 하는 뿌리 없는 자들의 상실감이다. 그 어떤 강한 식물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살 수 없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함께 모여 뿌리내리기 좋은 비옥한 숲(공동체) 같은 건 기대를 버린 지 오래. 2015년 기준으로 아무도 살지 않고 비어있는 집이 서울에만 7만9000여채에 달한다고 하는데, 왜 내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작은 화분 같은 공간조차 점점 더 구하기 어려워지는 것일까.


 대선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올해도 각 정당의 후보들은 앞다퉈 갖가지 부동산 정책들을 내놓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5년 전, 10년 전 레퍼토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벌써 10년 넘게 되풀이되고 있는 집값 안정 구호들.


 다시 봄 이사철이 돌아온다. 한국감정원 집계를 보면 서울의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2015년 1월 3억1152만원에서 3억7991만원으로 2년 새 22%나 뛰었다. 올봄 전세계약이 만료돼 이사를 하거나 재계약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당장 6800만원 이상을 추가로 마련해야 하는 셈이다. 대출 금리는 오를 일만 남았으니 하우스푸어도 대안은 못된다. 넉달 전,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마주쳤던 그 할머니는 이 집 구하기 전쟁에서 과연 좋은 집을 찾는 데 성공하셨을까. 그리고 기적적으로 이사하는 데 성공했던 나는 과연 2년 후에도 이 집에서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2017.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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