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힐튼 안토니 데니스 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 “인내·용기로 일군 남아공 민주화… 이젠 경제적 격차 해소가 과제”

국제뉴스/중동아프리카

by 정소군 2014. 4. 20. 15:03

본문

ㆍ데니스 주한 남아공 대사에게 듣는 ‘민주화 20년’


힐튼 안토니 데니스 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사진)는 37살이었던 20년 전,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던 순간의 벅찬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데니스 대사는 넬슨 만델라가 이끈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해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 참여한 남아공 민주화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는 “민주화 이전에는 투표 한번 해보는 것이 꿈이었다”며 “남아공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거쳐온 나는 행운아”라고 말했다.

올해로 남아공이 민주화 20주년을 맞았다. 1994년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후 처음으로 흑인들이 참여하는 자유총선이 열린 해다. 만델라는 서거했지만, 그가 남긴 ‘무지개 나라’의 정신은 남아공을 넘어 온 인류가 자랑스러워하는 소중한 자산이 됐다. 데니스 대사는 지난 17일 서울 한남동 남아공 대사관에서 남아공 민주화 20주년을 맞아 진행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평등하게 모여 사는 남아공은 한 민족, 한 언어, 한 종교로 구성돼야 한다는 전통적 국가의 개념을 넘어선 모범 사례”라며 “최근 분리주의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유럽과 향후 북한과 통일을 이룰 한국에도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힐튼 안토니 데니스 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는 남아공 민주화 20주년을 맞아 지난 17일 서울 한남동 남아공 대사관에서 진행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인종이 평등하게 모여 사는 남아공의 사례는 분리주의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유럽과 향후 북한과 통일을 이룰 한국에도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 첫 투표권 행사 감격 이후 국내총생산 3배나 늘었고 식수·전력 접근권도 개선

- 만델라 서거 후 얼마 되지 않아 맞은 민주화 20주년은 여러 의미에서 더욱 각별할 것 같은데.

“남아공은 그를 잃은 상처로부터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아직도 그에 대한 추억이 생생하다. 만델라는 남아공 민주화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모든 20주년 행사 역시 그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매년 7월18일은 유엔이 정한 ‘만델라의 날’인데, 유엔이 한 개인을 기념하는 날을 지정한 것은 만델라가 처음이다. 그는 그만큼 남아공을 넘어 온 인류에게 참으로 큰 사람이다.”

- 민주화 이전과 지금의 남아공은 무엇이 가장 크게 달라졌는가.

“아파르트헤이트 때 흑인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된 학교에 보낼 수 없었고, 공공장소에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때 나의 꿈은 투표 한번 해보는 것이었지만, 민주화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 이제 참정권은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다. 민주화 이후 남아공의 국내총생산(GDP)은 3배 가까이 증가했다. 10% 안팎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을 억누르는 데 쓴 비용을 생산적으로 전환한 덕분이다. 또 식수나 전력 등 사회기반시설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흑인들의 접근권도 크게 향상됐다. 남아공은 원주민, 아시아계, 유럽인 등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다인종 국가이다. 이 중 어느 한 그룹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무지개 나라’이다. 그래서 현재 남아공의 공식 언어는 무려 11개이다. 남아공에서는 그 어떤 인종도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지 않다.”

- 남아공의 민주화는 백인 정권과의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그것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이었는가.

“인내와 용서, 그리고 국제사회의 압력이었다. 협상은 굉장히 힘든 과정이었다. 백인 정권은 자신들이 누린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회에서 백인 의원석을 쿼터로 확보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협상을 통해 오늘날 남아공의 헌법 근간이 된 민주주의, 인종차별 철폐 등을 납득시키기 위해 우리는 2년 동안 ‘인내’해야 했다. 또 처음에는 백인 전범을 국제재판소에 세우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결국 ‘진실과화해위원회’를 만들어 보복보다는 그들이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용서해주고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도록 했다.”

▲ ‘무지개 나라’ 조화 위해 입법·사법·행정수도 분리, 지역 균형발전 정책 전개

- 하지만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빈곤문제를 겪고 있고, 심지어 일부에서는 백인들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등 흑백갈등의 뿌리는 남아 있는 것 같다.

“민주화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민주화 ‘이후’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여전히 부가 백인에게 편중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흑인보다 좋은 교육을 받은 백인들은 여전히 좋은 일자리를 구하고 부를 쌓기 유리하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공공·민간부문의 채용에서 흑인우대정책을 장려하고 있다. 증가 속도가 만족할 만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민주화 이후 흑인들의 중산층 증가가 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 남아공이 당면한 과제는 ‘인종 차별’보다 세계 모든 나라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계급격차’의 문제이다. 

- 남아공의 민주화 과정은 남아공을 넘어 인류 전체의 자산이기도 하다. 20주년을 맞아 남아공의 민주화가 전 세계 국제사회에 어떤 울림을 주길 바라는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민족과 종교로 인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유고슬라비아도 결국 분리됐고, 현재까지 유럽에서도 분리주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 직후 많은 사람들이 남아공도 분리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잘 유지해 오고 있다. 한국 역시 통일이 된 후 남아공의 예를 잘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흑백이 분리돼 있던 지역을 조화롭게 발전시키기 위해 입법수도, 사법수도, 행정수도 등 수도를 3군데로 나눴다. 한국도 나중에 평양과 서울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흑·백인 월수입 4배 차이… 만델라 이후 남아공 최대 난제로

지난 20년 동안 남아공에 생긴 변화는 단순히 흑인 대통령이 당선됐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민주화는 남아공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코페르니쿠스적인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흑인들의 정치 참여가 급속도로 증가했고, 경제와 사회 전반의 인프라도 놀랄 만큼 빠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20년 가까이 줄곧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여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빈곤과 부패 문제에 있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올해는 민주화 20주년이자 지난해 넬슨 만델라 서거 후 처음 총선이 열리는 해이기도 하다. 남아공과 ANC의 미래는 큰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다.


2012년 현재 남아공의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흑인 및 유색인종의 비율은 91%에 이른다. 민주화 이전에는 남아공 전체 인구의 10% 안팎에 불과한 백인들이 전체 공공서비스 일자리의 94%를 독점했던 것과 비교할 때 놀라운 변화다. 여성 고용의 증가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민주화 이후 제정된 남아공 헌법은 ‘인종차별’뿐 아니라 ‘성차별’ 등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그 결과 5%에 불과했던 여성 비율은 현재 40%까지 늘어났다. 

흑인들이 철저히 배제됐던 사회 전반의 인프라도 크게 확대됐다. 민주화 이전에는 백인과 흑인 거주구역이 분리돼 있었는데, 흑인 거주구역에는 의료서비스나 수도, 전기 등의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 더러운 식수 때문에 흑인 지역에서는 콜레라나 설사병 발병률이 무척 높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땔감으로 난방을 한 탓에 호흡기 질병도 만연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공공식수 접근권은 1994년 62%에서 현재 96% 수준까지 향상됐고, 전기를 사용하는 가구 비율도 50%에서 86%까지 늘어났다.

남아공이 당면한 과제는 여전히 만만치 않다. 인종차별법은 폐지됐지만 오랜 세월 지속돼온 남아공의 ‘흑백 격차’는 이제 ‘계급 격차’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아공 노동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남아공 기업 임원진의 3분의 2를 여전히 백인이 차지하고 있고, 흑인은 19.8%에 불과하다. 또 통계청 자료를 보면 백인의 월평균 수익은 1만600란드(약 106만원)에 이르지만 흑인은 그 4분의 1인 2600란드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오는 5월 치러질 남아공 총선을 앞두고 집권당인 ANC가 공격받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야당은 ANC 정부가 부패와 무능으로 빈곤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며 공격하고 있다. ANC는 흑인들의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따른 폐해를 20년 만에 극복하기는 어렵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만델라의 후광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ANC가 그 어느 때보다 위기에 봉착한 것은 사실이다. 최근에는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세금을 전용해 호화 관저를 지었다는 스캔들까지 터져 비판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현지 일간 메일앤드가디언은 “민주화 이후 줄곧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ANC가 초심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면서 “이번 선거에서 나타날 민심은 기로에 놓인 ANC에 대한 중요한 평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