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
ㆍ다카노 히데유키 지음·신창훈 외 옮김
ㆍ글항아리 | 508쪽 | 1만9800원
식민지서 독립한 연방 소말리아
독재·내전 ‘혼돈’의 남부와 달리
씨족 권위 남아있던 북부에선
씨족 간 ‘원한의 고리 끊기’ 결단
그들만의 나라 소말릴란드 세워
국제적 무관심에 ‘민주화’ 이뤄
‘아덴만 여명작전’으로 악명 높은 해적들의 소굴, 영화 <블랙호크 다운>의 무대가 된 혼돈의 내전 국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소말리아는 수십년째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런데 이 세계 최악의 ‘붕괴국가’ 한 귀퉁이에 독자적으로 내전을 종식시킨 후 수십년 동안 평화를 지켜온 ‘독립국가’가 있다. 누구도 국가로 인정해준 적 없지만, 자기들끼리 복수 정당제를 도입하고 보통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 심지어 평화적인 정권교체까지 이뤄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저 홀로 평화를 달성한 이 나라의 이름은 소말릴란드. 저자는 이곳을 ‘수수께끼의 나라’ ‘지상의 라퓨타’라 부른다.
이 책의 저자인 다카노 히데유키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가서,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하고, 그것을 재미나게 쓴다”가 모토인 일본의 논픽션 작가다. 우연히 소말릴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그는 처음에 코웃음을 쳤다. “사자와 호랑이가 포효하는 정글에서 토끼가 독자적인 평화국가를 이룬 듯한 그림”이라니. 와세다대 탐험부 출신인 그가 할 일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그곳에 직접 가보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인 만큼,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좌충우돌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수소문 끝에 일본에 살고 있는 소말릴란드인 한 명을 겨우 찾아낸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다급히 도움을 청하는 저자에게 그가 현지에 도착하면 만나보라며 종이에 써준 것은 다름 아닌 대통령과 대통령 대변인의 이름. 달랑 이름과 직함뿐 아무런 연락처도 없어 황당해하는 그에게 소말릴란드인은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긴다. “일단 가면 누군가 알려줄 거야.” 도대체 이 나라의 정체는 뭘까. 점점 더 미스터리해진다.
에티오피아를 경유해 엿새 만에 소말릴란드에 도착한 저자를 가장 먼저 놀라게 한 풍경은 거리에 총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설 경호원의 호위를 받지 않아도 납치될 우려 없이 외국인 혼자 밤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늘 서로 고함을 치지만, 길을 가로막고 있는 당나귀를 빨리 끌고 가라는 등의 한가한 시비일 뿐이다. 가난하지만 복작복작한 시장통 한가운데 있는 환전소에서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돈을 들고나올 때도 무장 강도를 만날지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경호원 서너명에게 둘러싸인 채가 아니라면 호텔 정문에서 50m 떨어진 슈퍼마켓조차 혼자 갈 수 없는 모가디슈(소말리아의 수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기적 같은 일이다. 소말릴란드 사람들도 “모가디슈에 가본 적이 있는데 총을 들고 서로를 죽이려 드는 곳이었어. 그런 무서운 데는 다시는 가기 싫어”라며 마치 외국의 분쟁 지역 체험 같은 이야기를 저자에게 늘어놓는다. 심지어 모가디슈에 사는 부자들은 일종의 피서처럼 1년에 한번씩 평화를 만끽하기 위해 소말릴란드로 ‘피전’을 온다고 한다.
소말릴란드가 이뤄낸 평화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나라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영국과 이탈리아가 나눠 가진 식민지 신세였던 소말리아는 1960년에야 독립에 성공해 연방공화국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곧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남부 출신 바레 대통령의 가혹한 독재정치가 시작된다. 비옥한 남부에 모든 정치와 경제가 집중됐고, 바레 대통령은 이에 저항하는 북부 지역에 폭격을 가하는 등 반대 의견을 철저히 탄압했다.
22년간 독재자로 군림해 온 바레 정권은 1991년 무너졌지만, 그때부터 소말리아에는 또 다른 지옥문이 열린다. 수많은 군벌과 씨족들이 대립하는 군웅할거 시대가 시작되면서 현재까지 무려 수십년 동안 무정부 상태가 지속돼 온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의 소말릴란드가 있는 북부 지역도 이 난장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바레 정권 시절 가장 큰 탄압을 받은 북부의 이스자아크 씨족이 정부 편에 붙어 자신들을 학살하는 데 가담했던 소수파 씨족들에게 피의 복수를 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이스자아크 씨족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과거 정부의 편이었던 2개 씨족과 회합을 열어 ‘구정부 시대의 원한은 모두 잊고 새출발한다’고 선언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는 복수의 고리를 끊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결단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인구 400만명 규모인 ‘지상의 라퓨타’, 소말릴란드이다. 이들은 이스자아크 씨족 출신을 초대 대통령으로 앉히고 정부를 세웠다. 이들 역시 이권을 둘러싼 내분과 무장해제에 반발하는 세력들 때문에 두 차례의 내전을 치러야 했다. 점점 남부 소말리아와 다를 바 없어지는 소말릴란드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씨족 지도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몇달에 걸쳐 회합을 벌인 끝에 모든 무장단체는 전투를 중단하고 무기를 반납하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줄거리만 써놓으면 싱거운 이야기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다. 이 책은 ‘다른 지역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 왜 소말릴란드에서는 가능했나’를 탐구하는 저자의 긴 여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환각 식물을 씹는 소말리인들의 사교모임인 ‘카트 연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평화협상 회합에 직접 참여했던 씨족 원로의 제자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소말릴란드의 평화 비결 중 하나로 이들의 전통인 씨족문화를 지목한다. 소말릴란드가 있는 북부 지역은 식민지 시절 영국령이었는데, 영국은 이렇다 할 자원 하나 없이 황량한 이곳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영국의 무관심 덕분에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씨족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말릴란드는 두 차례의 심각한 내전을 겪을 때조차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씨족의 규율인 ‘빌리 마 게이드’를 철저히 준수했다.
이들은 서로를 소개할 때 ○○가문-○○분가-○○○분분가로 세분화돼 있는 씨족의 내력을 전부 물어보기 때문에, 지금도 모두 ‘씨족망’의 그물로 얽혀있다. 이는 개인을 구속하기도 하지만 강력한 치안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고, 서로를 이어주는 연락망이 되기도 한다. 실제 대통령의 이름만 달랑 적어주면서 “일단 가면 누군가 연락처를 알려줄 거야”란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겼던 도쿄의 소말릴란드 사람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소말릴란드에 도착한 다음날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 호텔 프런트 직원에게 대통령 대변인의 연락처를 물어본 저자가 “마치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찾아주듯” 연락처를 알아다주는 직원에게 깜짝 놀라하는 재밌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하지만 비옥한 남부를 식민 지배했던 이탈리아는 효과적인 착취를 위해 그곳을 직접 통치하면서 씨족의 전통을 깨부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씨족 원로들의 중재가 통하지 않는 남부는 분쟁을 중단할 방법을 잃어버렸고, ‘빌리 마 게이드’ 규율이 깨지면서 복수가 더 큰 복수를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
이렇게 보면 소말릴란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곳인 덕에 역설적으로 평화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소말릴란드는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룩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과 유엔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더욱 악화돼 온 남부 소말리아와 달리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착실하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소말릴란드의 상황을 생각하면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 주장이다.
소말릴란드는 자신들의 문화와 실정에 맞게 민주주의 제도를 스스로 수정하며 발전시켜왔다. 소말릴란드는 씨족주의에 매몰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당의 숫자를 3개로 제한했다. 정당을 만들려면 반드시 몇개의 씨족이 손을 잡고 협력해야만 하니 ‘씨족 정당’이 난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2010년 치른 두번째 선거에서는 야당 후보가 여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정권교체까지 이뤄냈다. 아프리카에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일어난 것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부정선거가 많아 야당이 이기는 일이 드물뿐더러 설령 이긴다 해도 여당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말릴란드의 여당은 패배를 인정했다. 저자는 “노벨 평화상을 수여해도 이상할 것 없는 현상이지만, 국제사회는 ‘라퓨타의 기적’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며 애석해한다.
현재 국제사회는 식민지 시절 그어진 제멋대로의 국경선 때문에 내분이 잦은 아프리카에서 ‘우리도 독립하겠다’는 선언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올까봐 소말릴란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말릴란드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원조에서 배제돼 있다. 저자는 “소말릴란드를 독립국가로 인정하기 어렵다면 ‘안전한 장소’로만 인정해줘도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소말릴란드가 안전하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 기술과 투자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해적에게서 나오는 돈보다 국제사회에서 치안과 평화를 교환해 얻을 수 있는 돈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면 소말리아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소말릴란드처럼 총을 내려놓을지 모른다고 설득력 있게 호소한다.
일본에서 ‘고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한 이 책이 나온 것은 2013년. 그 후 6년이란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소말릴란드는 2017년에도 세번째 대통령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하는 자유지수에서 이웃한 에티오피아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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