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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기술의 원조’ 영국은 왜 정보통신 경쟁력을 잃었나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1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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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계획된 불평등
ㆍ마리 힉스 지음·권혜정 옮김
ㆍ이김 | 432쪽 | 2만2000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는 시인 바이런의 딸인 에이다 바이런 러브레이스이다. 에이다를 배출한 나라답게 영국의 컴퓨터 기술은 1940~1950년대까지만 해도 ‘애니악’으로 고전하고 있던 미국을 훨씬 앞서나갔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전자식 컴퓨터를 조립해 기계 암호해독을 성공리에 수행했다.

그러나 불과 30년 후 영국의 컴퓨터 산업은 거의 멸종상태에 이른다. 총리가 ‘기술혁명’을 선포하며 정부 지원금을 아끼지 않았지만 영국의 컴퓨터 기술은 빠른 속도로 경쟁력을 잃었다.

이 책은 그 원인을 산업이나 경제적 측면이 아니라 영국 정부가 그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 인력을 조직적으로 성별화해 차별한 데서 찾는다.

컴퓨터 기술의 태동기에 이 분야는 여성화된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가져다준 암호해독 작전도 여성 프로그래머들의 활약 덕분에 가능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전산기술이 단순업무로 여겨졌던 데다 “노동인구를 여성화하면 관리자가 권력을 더 많이 가져가고 자동화를 위한 조직개편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위급 정부 각료들은 기술 노동이 과거에 넘겨짚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경력개발에 뜻이 있는 젊은 남성 인재풀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성 관리자들은 ‘기계직급’이란 것을 신설해 숙련기술이 있는 여성들을 임금이 적은 하층 계급으로 끌어내린 후 중요하고 적절한 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저자는 이런 ‘계획된 불평등’이 영국 컴퓨터 기술을 경쟁에서 도태되게 만든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천부적인 수학능력을 가지고도 성차별 때문에 나사의 프로젝트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피겨스>처럼 이 책은 중요하고 전문적인 일을 하고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여성 기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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