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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해고가 불러온 ‘사회적 재난’ 생생히 기록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16.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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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제인스빌 이야기
ㆍ에이미 골드스타인 지음·이세영 옮김
ㆍ세종서적 | 508쪽 | 1만8000



위스콘신주의 소도시 제인스빌

85년간 도시 떠받치던 GM공장

금융위기 닥치자 주저없이 폐쇄

실직 연쇄효과 ‘빈곤지역’ 전락

복지 확충 외면한 정치인들은

규제완화 기업 유치만 큰소리

본말 전도된 회생 정책에 분노

한국의 군산·부평 ‘타산지석’


2008 1223일, 미국 제인스빌의 GM 공장에서 생산하는 마지막 자동차가 조립라인 끝에 당도했다. 공장 안은 이제 곧 해고될 운명에 놓인 노동자들과 이곳에 평생을 바쳤던 퇴직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충격과 향수에 젖은 이들은 구불구불한 조립라인 위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뒤따른다. 눈부시게 빛나는 검은색 SUV 앞에서 누군가가 “제인스빌 조립라인에서 출고된 마지막 자동차”라는 현수막을 펼쳐든다. 이 최후의 장면을 담기 위해 세계 각지의 TV 방송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았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이다음 순간부터다. 이 책은 공장이 폐쇄된 후 제인스빌에서 벌어진 7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 위스콘신주에 있는 인구 6만여명 규모의 소도시 제인스빌은 도시 전체가 GM 공장의 조립라인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5년 동안 이 공장은 “막강한 마법사처럼 도시의 생활리듬을 규율했다”. 라디오 방송국은 뉴스 시간을 공장의 근무교대 주기에 맞춰 편성했다. 주민들은 부품과 완성차를 실어 나르는 화물 열차의 운행시간에 맞춰 시내 외출계획을 짰다. 아이들은 GM 공장에서 일하는 부모를 보며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되기 위해 길러졌다. GM은 그 답례로 100만대째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영예를 제인스빌 공장에 선사했다. 그래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자마자 GM이 한순간에 이 도시를 버리고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2008 년   12 월 23 일   GM 의 미국 제인스빌 공장에서 생산된 마지막 자동차를 전·현직 노동자들이 빙 에워싼 채 바라보고 있다.   2018 년 제인스빌 공장은   50 만달러에 매각됐다.   AP   연합뉴스


공장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것은 GM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이는 도시 전체에 내려진 ‘사망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GM 부품을 더 이상 하역할 필요가 없어진 화물 조차장 노동자, 지갑을 열지 않는 고객들 때문에 점포 문을 닫은 소매업자들, 일감을 찾지 못해 집에만 있는 부모들이 아이를 맡기지 않자 수입이 끊긴 데이케어 운영자들. 2008~2009년 제인스빌과 인근 지역에서는 9000여명의 노동자가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버거킹과 마트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하층 노동자들은 이제 일자리를 잃은 자동차 노동자들과도 경쟁을 해야 했다. ‘신빈곤층’으로 전락한 중산층 가계들은 “눈에 띄는 일자리를 무조건 움켜쥐고 보겠다는 태세”로 달려들었다. “빈곤을 향한 연쇄적 하락”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자녀를 방치한 채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떠나거나,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자녀를 데리고 친척집 소파를 전전해야 했다.

세 아이의 아빠인 제러드 휘태커는 공장에서 13년 동안 일했던 해고 노동자다. 공장 폐쇄 후 1년 동안 실직 상태였던 그는 플라스틱 만드는 회사에 겨우 일자리를 얻는다. 하지만 급료는 시간당 12.4달러에 불과했다. GM에서 받던 시간당 28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제러드는 몇 달러라도 시급이 높은 곳을 찾아 계속 직장을 옮기지만 그 과정에서 밀실공포증과 우울 증세를 얻는다. 고등학생인 쌍둥이 딸은 변해가는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지친 표정을 보며 자신들이 무언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들은 아르바이트비를 모아둔 자신들의 계좌에 부모의 예금잔액보다 더 많은 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맷 위팻은 제인스빌에서 일자리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수백명의 GM 노동자들처럼 ‘GM 집시’가 되는 쪽을 택한다. 그는 제인스빌에서 4시간30분 거리에 있는 포트웨인 GM 공장에서 일하기로 했다. 7시간30분이나 걸리는 캔자스시티의 페어팩스 공장으로 간 동료에 비하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된 그는 주말에만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있다. 맷은 이 상황에 화가 나지만,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파산신청을 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받을 실업수당을 위해 거액을 지출하는 GM이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예산을 지출하는 정부를 탓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을 탓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이 맷은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해체되고 있는 공장 설비들.   Bergeron   Media


이 책은 GM 공장 해고 노동자는 물론이고 이들의 재취업을 돕기 위해 뛰어다닌 취업센터 책임자, 공장 폐쇄를 막으려 애쓴 국회의원,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고군분투한 시민단체 관계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을 교차해가며 제인스빌을 덮친 ‘사회적 재난’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이 책의 저자인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맷의 말처럼 이 비극의 원인이 누구의 탓이라고 굳이 지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가 차분하고도 충실하게 복기해 낸 7년 동안의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아귀가 맞지 않고 본말이 전도된 지역회생 정책에 답답함과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일자리 창출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공화당 출신의 주지사는 ‘감세’와 ‘규제완화’로 민간기업을 유치해 지역을 되살리겠다고 큰소리친다. 정치인과 지역 유지들은 우라늄을 이용하는 메디컬 테크놀로지 회사를 유치하기 위해 부지·기반시설 제공, 세금 경감 등 900만달러의 인센티브를 당근으로 제시한다. 제인스빌의 2012년 전체 예산이 4200만달러임을 비춰보면 엄청난 규모다. 이는 제인스빌에 새로운 산업 동력을 만들려는 시도이긴 했지만, 전체 직원 150명 정도인 이 회사에서 우라늄 지식을 갖춘 외지의 과학 전문가가 아닌 제인스빌 주민에게 돌아갈 일자리 수는 손으로 꼽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제인스빌 시의회가 메디컬 회사에 지원할 900만달러의 인센티브를 승인한 날로부터 불과 일주일 뒤, 홈리스 청소년들이 머물 쉼터를 마련하기 위해 사회복지사가 추진하던 프로젝트는 재원 부족으로 좌초하고 만다. 가정이 해체되면서 갈 곳 없는 청소년은 늘어나는데 이들을 위한 정부의 예산 항목은 전무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무상급식을 지원받는 아이들의 수는 공장이 폐쇄되기 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오히려 정부는 예산 감축을 명목으로 학교 사회복지사를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여버렸다.

정부의 빈자리를 메워주던 시민사회의 복지사업들은 기부금이 부족해 하나둘 망가져가고 있지만, 정치 후원금만은 여전히 풍년이다. 주지사는 노조파괴 정책에 대한 반발로 자신에 대한 소환 선거가 열리자 5900만달러의 후원금을 끌어모은다. 그는 결국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다.

실직자 재취업을 돕는 취업센터 책임자인 밥 버러먼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신설한 ‘자동차 산업지역과 자동차 노동자를 위한 백악관 자문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인스빌을 한번만 방문해 달라고 줄기차게 청원한다. 해고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 맞춤형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연방 정부의 지원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인스빌이 운영하고 있던 실직자 재교육 프로그램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컴퓨터 정보기술을 공부한 실직자가 그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식료품 포장 일을 하고 있는 식이었다. 심지어 재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취업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욱 낮았고 실질소득 하락률은 더 컸다.

밥이 그토록 소원했던 자문위원장의 방문은 자문위원회가 신설된 후 1년여 만에 겨우 이뤄졌다. 하지만 위원장은 제임스빌을 방문한 지 불과 2주 후 자문위원장에서 물러나 한 대학 총장직으로 자리를 옮긴다. 자문위원회는 그 후 폐지된다. 열과 성을 다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던 취업센터 책임자의 간곡한 요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메아리 없이 흩어졌다.

이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수치상으로만 놓고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제인스빌은 GM 공장 폐쇄의 충격을 모두 극복해냈다. 2015년 제인스빌이 속한 록카운티의 실업률은 4% 아래까지 떨어져 21세기가 시작된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두 자릿수였던 산업공간 공실률은 7%대로 낮아졌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2년 일찌감치 “미국 자동차 산업은 정상의 자리로 복귀했다”고 자축한 바 있다.

저자는 제인스빌이 과연 회생에 성공했는지 여부를 독자의 판단에 맡기면서도 또 다른 수치들을 제시한다. 저자가 2013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분의 3은 미국이 여전히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으며,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들도 절반 이상이 제러드 휘태커의 사례처럼 이전보다 실질소득이 크게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정부는 GM에 구제금융과 파산보호신청의 대가로 500억달러의 정부 융자금을 지원했지만, GM의 공장폐쇄와 인력감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5월31 GM은 한국의 군산 공장을 폐쇄했다. 1800여명의 공장 직원은 물론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1만여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인스빌의 사례가 군산, 부평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두렵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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