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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도는 입학사정관제… 학생도 사정관도 답답한 ‘고문관제’

교육복지

by 정소군 2010. 10. 1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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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다양한 재능평가 무색… 초등생부터 스펙 쌓기

ㆍ너무 급하게 확대 적용, 부작용 커 우려 목소리



14일 오전 서울 노원구민회관은 800석 가까이 되는 좌석이 발 디딜 틈 없이 메워졌다. 한 독서·논술 사교육업체가 2011학년도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입학사정관제 스펙 만들기’ 설명회 자리였다. 학부모들은 강사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수첩을 꺼내들고 필기를 하느라 바쁘게 손을 놀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초·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었다. 대학입시에서 입학사정관 전형 비율이 빠르게 확대되자 학부모들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준비를 시켜야 한다는 조급증이 생긴 것이다. 한 학부모는 “어렸을 때 읽은 책까지 입시자료로 쓰인다고 하니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면서 “요샌 초등학교 때부터 스펙(이력)을 쌓는다는데 우리 아이는 벌써 중학생이라 너무 늦은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초조해했다.


입학사정관제가 교육계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고등학교 수험생 가족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유치원생 학부모까지 모두 입학사정관제에 대비하겠다며 들썩이고 있다. 시험 성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학생의 다양한 재능을 평가하자는 입학사정관제가 교육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원래 취지와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고등학교 3학년 이모양(18)은 최근 입학사정관 전형을 준비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이양은 “다른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자기소개서를 1학년 때 써보고, 2학년 때 다시 쓰고, 3학년까지 계속 업그레이드하면서 준비해왔더라”며 “나는 이번에 자기소개서를 처음 쓰려니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친구가 ‘대필을 맡기라’고 했다. 실제로 대필해주는 학원도 많다고 들었다”고 털어놨다.


서울 강서 지역의 고교 3학년 김모양(18)은 “학급 간부를 지내는 등 나름대로 학교 생활을 충실히 해왔지만 불안해서 여름방학 때 헌혈도 하고 봉사활동도 가능한 한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 우수 사례를 보면 힘든 과정을 잘 극복한 얘기를 높게 평가한다고 들었다”며 “그래서 아이들이 별로 힘들지 않았던 경험을 과장해서 쓰기도 한다”고 전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입학사정관으로 일하는 박모씨(33)는 “공정성 시비 때문에 외부 수상실적을 학교생활기록부에 반영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사실 학생들의 교내 활동 실적은 큰 차이가 없다”면서 “결국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정보가 부족해 성적 같은 객관적 지표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지난해에는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뽑힌 학생들의 내신등급이 다른 일반전형 합격자보다 높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지난 13일 열린 ‘학부모와 함께하는 교육정책 설명회’에서 “입학사정관제는 꼭 성공해야 하는 제도로, 모든 정책은 시간이 필요하고 시행 초기에는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 현재 안착단계로 가고 있고 매년 좋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정유진·심혜리 기자 sogun77@kyunghyang.com>




지원금 미끼로 ‘밀어붙이는 정부’ - 지원금 눈멀어 ‘준비안된 대학들’






더 이상 입시제도가 ‘성적 줄세우기’가 되어선 안된다는 것은 진보와 보수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객관화된 시험성적으로 평가될 수 없는 학생의 다양한 재능을 평가하자는 입학사정관제가 양쪽 모두의 우려를 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은 정부가 임기 내 입학사정관제를 안착시키기 위해 과도한 욕심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임기 말(2012년) 대학들이 입학사정관제로 100% 가까이 학생을 뽑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벌써 2011학년도의 입학사정관제 선발 인원이 전체 4년제 대학 모집정원의 10%에 육박하고 있다. 시범실시가 시작된 지 불과 3년 만의 일이다. 이는 정부가 대학들에게 재정지원을 미끼로 던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236억원, 올해 350억원의 예산을 입학사정관제 도입 대학에 지원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대학들이 지원금을 타내기 위해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앞다퉈 입학사정관제 도입에 나서면서 사실상 ‘눈먼 돈’이 됐다”고 지적했다. 권 의원실이 공개한 ‘2009년 입학사정관제 운영지원사업 예산’을 보면, 외유성 여행비용으로 낭비되거나 기념품 구입에 쓰이는 등 지원금이 주먹구구식으로 쓰인 사실이 드러난다.


제도 성공의 핵심 열쇠인 입학사정관의 전문성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다.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의 국감 자료에 따르면, 전임 입학사정관 가운데 80% 이상은 경력 2년 이하이며 이 중 68%가 통찰력을 갖추기엔 아직 노련미가 부족한 20~30대에 불과하다.


여기에 대학들이 시험성적 우수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입학사정관의 평가 재량권이 특목고생 선발 확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될 소지가 높다. ‘공정성’ 우려가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아직 초기단계인 만큼 부작용이 없을 수 없겠지만, 제도가 정착돼 가면서 한 해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김승현 정책실장은 “그렇게 되려면 교과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별 정책들이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2009 개정교육과정’도 원래 취지는 학생들이 자신의 관심 분야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골라 들을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입학사정관들은 단순히 점수 줄세우기가 아니라 어떤 과목을 들었고 어떻게 자신의 적성을 심화시켰느냐로 학생을 평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고질적 입시병폐 속에서 이는 오히려 사회 및 예체능 교과목을 죽이고 국·영·수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입학사정관제가 활성화되면 0교시 수업이 자연스레 폐지될 것으로 보지만, 대학에 가기 위해 당장 그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학생들은 교과 공부는 교과 공부대로, 입학사정관 면접은 면접대로 다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좋은교사운동’의 홍인기 정책실장은 “대학들의 전문성과 공정성이 확보되지 못한 채 성급히 확대된다면 제도 자체가 흔들려 기존의 점수 줄세우기로 되돌아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ㆍ입학사정관제 도입과 그 후


입학사정관제는 참여정부 시절 검토가 시작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시범실시됐다.


이명박 정부는 입학사정관제가 대학 자율화를 달성하면서 3불(본고사·기여입학·고교등급제 금지) 논란을 비켜 갈 수 있는 묘안이 될 것이라 여겼다. 대학들이 여러가지 전형을 만들어 다양한 잣대로 뽑고 싶은 학생을 뽑으면, 평등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논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대학 자율화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현 정부 교육정책의 입안자로 평가받는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2006년 펴낸 저서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에서 입학사정관제를 고교 내신반영 자율화와 더불어 ‘대입자율화 3단계 방안’의 첫 단계로 제시했다. 실제 이 장관이 차관 시절부터 추진한 모든 정책의 정점에는 입학사정관제가 자리잡고 있다. 자율형사립고와 수능개편안 등은 일각에서 학교 서열화 및 국·영·수 강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원래는 고교 다양화 및 수능 응시과목 축소로 입학사정관의 권한을 확대해주자는 의도였다.


2004년 참여정부가 처음 입학사정관제 도입을 논의할 때는 지금과는 취지 자체가 조금 달랐다. 사교육비 절감 대책의 일환으로 대학입시 전형의 중심 축을 수능에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쪽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각 대학에 별도의 예산 지원도 하지 않았다. 활용 여부는 각 대학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입학사정관제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던 이주호 장관이 국회 예결위에서 입학사정관제 시행을 위한 예산 20억원을 관철시키면서다. 그해 서울대·가톨릭대·경희대·중앙대 등 10개 대학이 입학사정관 전형 시범대학으로 지정됐다. 정권이 바뀌면서 입학사정관제는 강력히 추진되기 시작했다. 2011학년도 입학사정관제 모집인원은 총 188개 대학에 3만4408명으로 2009학년도 4476명에 비해 2년 만에 8배 가까이 급증했다. 정부 지원금도 350여억원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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