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반부패 운동가 출신…공무원들 ‘부패 들킬라’ 서류 소각과연 시민운동가의 이상은 현실 정치 무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도 델리의 새 주총리로 취임한 아르빈드 케지리왈(45)의 정치 실험이 닻을 올렸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수돗물도 쓰기 힘들다는 인도 사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은 반부패 시민운동가 출신인 그에게 열광하고 있다.
지난 29일 그는 취임식 장소까지 전철을 타고 갔다. 경찰의 호위 속에 도로를 통제한 후 관용차를 타고 등장한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이를 보던 사회비평가 산토쉬 데사이는 “인도 정치 역사에서 있을 수 없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일부 현지 언론들은 케지리왈이 취임하기 직전 공무원들이 서류를 소각하느라 부산을 떨었다고 보도했다. 케지리왈이 그동안 관행처럼 해온 부패의 기록을 적발해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케지리왈은 취임 후 3일째인 31일 모든 가구에 하루 660ℓ(월 20㎘) 한도 내에서 물을 공짜로 공급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델리는 심각한 물 부족난 때문에 수도세가 끊임없이 오르고 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꼭 필요한 식수조차도 마음놓고 쓰기 어려웠다. 대신 케지리왈은 660ℓ를 초과해 물을 쓰는 사람에게는 수도세를 모두 물릴 뿐 아니라 수도세율도 현재보다 10%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이번 방침은 가난한 가구에는 수도세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부자들에게는 부담을 더 늘리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르빈드 케지리왈 인도 델리 주총리(가운데)가 지난 29일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를 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델리 | AP연합뉴스
케지리왈의 이력은 그의 새로운 정치적 행보만큼이나 독특하다. 콜카타의 한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테레사 수녀를 직접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 만남을 통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도를 바꾸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1992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조사관이 됐지만, 세무공무원으로서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딱히 없다는 데 염증을 느끼고 2006년 사표를 냈다.
이후 그는 반부패 및 정보공개를 위한 시민단체를 만들어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인도의 대표적 시민운동가인 안나 하자레와 함께 부패를 저지른 고위공직자를 엄벌하는 ‘반부패 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여 전국적인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 이 법안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케지리왈은 2012년 ‘보통사람들’이란 뜻을 가진 ‘암아드미당’을 창당한다. 그의 선거운동 방식은 달랐다. 평상복 차림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엔지니어로 일한 경험을 살려서 단전 가구를 찾아가 전깃줄을 직접 연결해주기도 했다. 결국 처음 창당할 때만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그의 정당은 델리에서 전체 70석 가운데 28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실험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상은 이상일 뿐 현실에서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다. 경제학자인 비벡 데브로이는 “공짜 물 정책은 납세자와 델리 주정부 예산에 엄청난 비용 부담을 지우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케지리왈은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요술지팡이 같은 것은 없다. 나도 ‘보통사람’일 뿐”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델리의 ‘보통사람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조금씩 불의를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