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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에게

문화생활

by 정소군 2005. 10. 23.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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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창문 너머 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다 문득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어요. 매일 아침 우체국 계단을 오르던 당신의 말갛던 얼굴. 빨갛고 노란 단풍잎을 스카치 테이프로 꽁꽁 붙여놓았던 당신의 편지봉투.

우체국 일을 처음 시작했던 스무살 무렵, 제겐 편지를 부치러 오는 모든 이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은 특별했어요. 당신은 우리 마을에 처음 생긴, 세련된 신식 카페에서 일하던 아가씨였으니까요. 남자들에게 인기가 꽤 많았을 것 같은 당신은, 그러나 매일같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편지를 부치러 왔었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과 나만의 작은 비밀을. 제가 처음으로 우체국 규정을 어기게 된 건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수줍게 건네주던 편지봉투는 항상 무거웠었죠. 편지봉투 안에 다닥다닥 붙여둔 10원짜리 동전들. 편지가 잘 도착했으면 꼭 공중전화로 연락해 달라는, 그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돈은 우편으로 부칠 수 없게 돼 있지만, 당신의 간절한 마음을 생각하니 그냥 눈감아 버릴 수밖에요.

“오늘도 사진을 참 많이 넣으셨네요.” 짐짓 말을 건네면 당신은 발그레한 얼굴로 웃고만 있었지요. 동전의 무게는 그렇게 사진으로 둔갑해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남았습니다.

혹시 이것도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이 그에게 주려고 예쁜 유리병 가득 초콜릿을 담아왔던 일 말이에요. 그땐 포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유리병은 소포로 부칠 수가 없었죠. 병이 깨질 수 있어 소포배달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당신은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밤새 유리병을 꾸몄을 당신 때문에,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저도 정말 가슴이 아팠답니다.

이젠 그때처럼 마음 졸여가며 10원짜리 동전을 편지봉투 안에 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대폰 한통화면 편지가 잘 도착했다고 금세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젠 유리병도 얼마든지 소포로 부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정작 부쳐줄 편지가 없네요.

수신인 부재로 반송돼 온 엽서처럼, 누군가를 그리던 사람들의 마음은 갈 곳을 잃었나봅니다. 무슨 말을 쓸까 시집을 뒤적여가며 하얗게 지새웠던 그 많은 밤들. 이제 사람들은 그 무수한 밤을 무슨 생각을 하며 보내고 있는 걸까요. ‘우(郵)다방’이란 애칭으로 불릴 만큼 따뜻한 정이 오갔던 그 옛날 우체국은 이렇듯 도심 속 외딴 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요.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나 흘러버렸습니다. 스무살 꽃다웠던 당신도 지금은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있을 테지요. 창구 여직원이었던 저도 어느덧 근속 20년을 바라보는 우체국 과장이 되었습니다.

유독 가을이 되면 당신이 생각납니다. 지금 당신의 옆에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가 함께 있는지, 지금도 가끔 편지를 쓰러 우체국에 들르시는지, 그리고 그때 당신과 작은 비밀을 공유했던 한 우체국 여직원을 기억하는지.

우표를 붙일 때의 뿌듯했던 마음과 빨간 우체통이 아련히 떠오를 때면, 그리움으로 향하는 우체국 계단을 다시한번 밟고 올라와주세요. 전 지금도 그때 그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해우체국 지원과장 제을숙 드림.

〈진해/글 정유진기자 sogun77@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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