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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

칼럼

by 정소군 2022. 3. 2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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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 전 세계를 휩쓴 올 한 해에도 나는 무사했다. 아직까지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았고, 확진자와 접촉해 자가격리가 된 적도 없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마스크를 쓰고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려 애쓰긴 했지만, 나의 무사함이 내 노력만으로 가능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매일 버스를 타고 출근해 하루 종일 회사에서 사람들과 부대꼈다. 도시락을 준비한 날보다 구내식당이나 회사 근처 식당을 이용한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주말에는 마트에 가서 장을 봤고, 한 엘리베이터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숨을 쉬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들 필수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한 바이러스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 있는 순간은 언제든 찾아온다. 그런 무수한 순간들 속에서도 지난 1년간 내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위 사람들의 노력과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자리에서 잠시 마스크를 벗고 있다가도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걸어오는 내 모습이 멀리서부터 눈에 띄면 서둘러 다시 마스크를 끼는 직장 동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고마움을 느낀다. 점심을 함께 먹었으니 사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 공동운명체인 관계이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코로나19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순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끈질긴 노력 덕분에 올 한 해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이름 모를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모두가 철저히 마스크를 써준 덕분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고립된 한 해였지만, 올해만큼 나와 연결된 사회의 존재를 제대로 실감한 적이 없다.

내일은 또 몇 명의 확진자가 쏟아질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 때,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과 위로를 준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의도하지 않게 코로나19 감염으로 확진 판정을 받으신 이웃분의 빠른 쾌유를 응원합니다. 저희 식구도 그분과 같은 승강기에 탑승해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분도 저희도 마스크를 잘 착용한 상태라 (우리 식구는) 음성이 나왔습니다. 마스크의 중요함을 알려드리고 우리 이웃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씁니다.” 경남 양산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손편지 내용이라고 한다. 그 편지로 인해 ‘혹시 내가 나중에 의도치 않게 확진되더라도 비난 아닌 응원을 해줄 사람들이 우리 사회 어딘가엔 있겠구나’라는 위로를 얻은 사람들이 그 아파트 주민들만은 아닐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경기 용인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한 자영업자는 ‘월세를 10만원이라도 깎아주시면 많은 힘이 될 것 같다’는 문자를 임대인에게 보냈다가 다음날 계좌로 입금된 100만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자의 어려움은 누군가의 선의나 기부에 기댈 것이 아니라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책에 의해 해소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부족한 정부 지원 속에서도 자영업자들이 이제까지 근근이 버텨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분들의 도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저물어가는 올 한 해를 돌이켜보니 우리 모두는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이 문구는 코로나19 유행 속에서도 노숙인 무료급식을 멈추지 않았던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가 쓴 책 제목이다. 코로나19로 후원금과 자원봉사자가 줄어들어 운영이 어려운 위기에 처했음에도, 이곳마저 문을 닫으면 하루 한 끼도 해결할 수 없는 노숙인들을 위해 고군분투해온 그의 지난 275일간을 기록한 책이다.

매 순간의 두려움 속에서도 매일의 기적 속에 버텨올 수 있었던 우리의 지난 1년은 이런 모든 분들의 노력과 헌신에 빚을 지고 있다.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고, 확진자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감염 위험을 무릅쓴 채 코로나19에 가려진 사람들을 돌봐온 모든 사람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코로나19 최전선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온 의료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 커서 이 짧은 글 안에 함께 담아내기 어렵다.

다가올 새해도 쉽지 않은 한 해가 될 것이다. 현재진행형인 3차 대유행의 정점은 아직 보이지 않고, 백신을 통해 집단면역을 이루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분들이 전해준 위로와 희망 덕분에 내년 한 해를 다시 버텨 나갈 용기를 얻는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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