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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리건 발렌타인과 김미숙

칼럼

by 정소군 2022. 3. 2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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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의회에서 중대재해 사고를 낸 기업에 대한 처벌을 큰 폭으로 강화한 일명 ‘기업살인법’(industrial manslaughter law)이 통과됐다. 법안이 통과된 순간 현지 언론들이 누구보다 먼저 마이크를 들이댄 사람은 3년 전만 해도 그저 평범한 엄마였을 뿐이었던, 리건 발렌타인(Regan Ballantine)이라는 여성이었다.

 

발렌타인은 2017년 1월 산재 사고로 아들 웨슬리를 잃었다. 웨슬리는 유리 천장을 설치하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가 12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기타 치는 것을 좋아했고, 트럼펫을 배우고 싶어했던 웨슬리의 나이는 당시 불과 17세였다.

웨슬리는 사망 당시 안전대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안전대를 연결할 훅이 작업 현장의 어느 곳에도 설치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낙하 방지 그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웨슬리는 12m 높이 허공에 떠 있는 가느다란 철골 구조물과 위태로운 널빤지 위를 곡예하듯 걸어다니며 작업을 하다가, 전혀 놀랍지 않게, 추락했다.

하지만 웨슬리를 고용한 업체에 내려진 처벌은 고작 벌금 3만8000호주달러(약 3071만원). 호주의 1년치 최저임금보다도 적은 액수였다.

“(이 나라가) 아직 꿈도 펼쳐보지 못한 내 아들의 생명을 종이조각 취급했어요. 이 나라의 시스템은 단지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겁니다. 다시는 누구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바랍니다.”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발렌타인은 그 길로 거리로 나섰다. 산재 사고 유족 단체인 ‘남겨진 가족들’(Families left behind)의 대변인을 맡아 기업살인법 통과를 위해 어디든 달려갔다.

주의회는 감히 이들의 목소리를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서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중대한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전조치를 게을리한 고용주나 관리 책임자는 5년에서 최대 2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기업에는 최대 1000만호주달러(약 806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특히 이 법은 산재 벌금을 보험 처리할 수 없다는 조항까지 달아 고용주가 생명을 놓고 ‘비용절감’할 수 있는 길을 봉쇄했다.

법안이 통과된 다음날 의회 건물 앞에서 환영 집회를 연 발렌타인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제 옆에는 산재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잃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이 아닙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앞줄 맨 오른쪽) 등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의 가족들이 정의당 의원들과 함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11 일 국회 본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이 이야기의 중반까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익숙한 이야기이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 ‘남겨진 가족들’이 있다면, 우리 사회에는 산재 유가족들의 모임인 ‘다시는’이 있다. 3년 전 아들을 잃고 기업살인법 제정에 온 힘을 쏟게 된 발렌타인처럼, 2년 전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이었던 아들 김용균씨를 잃은 엄마 김미숙씨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김미숙씨가 올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국민 청원은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아직까지 이 이야기는 오직 결말만 다를 뿐이다. 시민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인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의회와 달리, 174석을 독점한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10명 중 6명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찬성하고 있는데도, “기업에 미칠 타격이 너무 클 수 있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도대체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 비해 우리에게 무엇이 더 부족한가. 죽음이 부족한가, 유족들의 눈물이 부족한가. 우리에겐 이미 차고 넘친다. 한국에서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에 부과되는 벌금은 고작 450만원에 불과하다.

이 법은 기업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업살인법을 제정한 다른 나라들은 어디 기업에 타격을 주고 싶어서 만들었겠는가. 부디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방 가능한 노동자의 죽음을 막으라는 것이다.

나는 같은 결말을 바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된 날, 국회 앞에서 김미숙씨를 비롯한 ‘다시는’ 산재 유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이들이 “우리는 이미 가족을 잃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으로 의미를 되찾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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