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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쪽방촌 주민 A씨의 가난

칼럼

by 정소군 2022. 3. 2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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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경향신문이 연재한 <기후변화의 증인> 시리즈를 쓴 후배 기자는 제주도 해녀, 지리산 산지기, 양봉업자, 건설노동자 등 바로 지금, 일상에서 기후위기의 현실과 맞닥뜨린 수많은 ‘증인’들을 만나고 왔다.

서울 돈의동 쪽방촌 주민 A씨(60)도 그중 한 명이었다. 뇌질환이 있는 그는 2년 전 병원비 때문에 쪽방에서조차 밀려났다가 겨우 다시 돌아오게 된 경우였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 채 창문도 없는 좁은 방들이 다닥다닥 마주 붙어 있는 쪽방촌은, 여름이 되면 더운 공기가 고여 거대한 찜질방이 되는 곳이다.

 

후배는 쪽방촌 주민들이 겪는 폭염의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A씨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A씨의 대답은 시종일관 뜨뜻미지근했다. ‘여름엔 더워서 방에 계시기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현관문을 열어두면 조금 시원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더운 바람이 나와 별 소용이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틀어놓고 있으면 그래도 좀 낫다”고 했다. ‘날씨가 더워지면 어떤 점이 가장 힘든지’ 물었을 때도 A씨는 뜬금없이 “딴게 아니라 병원 가서 매일 주사 맞고 오는 게 무척 힘들다”고 말했다.

결국 다른 쪽방촌 주민들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후배는 A씨 인터뷰를 그만 마무리하기로 했다. 감사 인사를 드린 후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찰나, 후배의 귀에 A씨가 작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강남까지 걸어서 왔다갔다 하니까 더워지면 그게 제일 힘들지….”

알고 보니 A씨는 주사를 맞으러 강남에 있는 대형병원까지 걸어서 다니고 있었다. 가는 데만 4시간, 왕복 8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저는 몸에 마비가 자주 오다보니까 다른 사람보다 걷는 데 시간이 더 걸려요. 수급비가 나오긴 하는데 병원비 주고, 방세 주고, 먹을 거 조금 사다두고 하면, (차비로 쓸) 돈이 없어서….”

후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후배의 말을 듣는 순간 나 역시도 할 말을 잃었다. 후배는 그제서야 A씨가 했던 모든 말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폭염 속에 왕복 8시간씩 병원까지 걸어다니는 사람에게는 쪽방에서 더운 바람 나오는 선풍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그나마 시원했겠구나. 이분은 계속 그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부자들은 가난을 통계 지표로 객관화해서 이해하지만, 가난은 개념(poverty)이 아니라 생활(being poor)이다.” 소설가 김훈이 어느 책에 쓴 추천사에서 한 말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인 A씨의 가난은 ‘중위소득 30~40% 이하’ 같은 통계 지표로 설명될 수 없다. 그의 가난은 뙤약볕 속에 8시간 동안 걸어서 병원에 다녀오느라, 공기가 통하지 않는 좁은 쪽방 안의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더운 바람이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돼버린 생활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한국에 시행된 지 지난 1일로 꼭 20년이 됐다. 외환위기로 빈곤 문제가 심각해진 상황에서 빈곤층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제도는 빈곤층에 대한 소득 보장을 ‘사회권’의 하나로 규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의의만큼 의지는 따라주지 않아서, 코로나19로 빈곤층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올해도 수급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중위소득은 2.68% ‘찔끔’ 인상되는 데 그쳤다. 시민사회에서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의료급여의 부양의무자제도도 ‘폐지’가 아니라 ‘완화’되는 데 그쳤다.

앞으로의 20년은 지난 20년보다 빈곤층에게 더욱 가혹한 미래가 될 것이다. 올여름 폭염은 다행히도 예상만큼 심하지 않았지만, 대신 불행히도 사상 최대의 긴 장마와 물난리가 이어졌다. 올겨울에는 2012년 이후 최강 한파가 올 것이라는, 다소 이른 관측까지 나온다. 기후재난이 가속화되면 앞으로도 A씨의 쪽방은 계속 덥거나, 습하거나, 추울 것이다. 그리고 A씨가 병원까지 걸어다녀야 하는 길은 더욱 험난해질 것이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덮쳐올 때마다 무료급식소는 이번처럼 계속 문을 닫을 것이고, 그때마다 빈곤 노인들은 문 연 급식소를 찾아 헤매야 할 것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온갖 사회적 재난이 중첩되어 빈곤층을 빠르게 덮치고 있는데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확대 속도는 너무나 느리다. 그래도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며 위안할 때가 아니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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