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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코로나19가 드러낸 ‘불평등 사회’ (2020.6.29)

칼럼

by 정소군 2022. 3. 2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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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은 사람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들지 않는다. 단지 그의 본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몇해 전 어느 송년모임에서 누군가가 건배사를 하면서 인용했던 명언이다. 건배사에도, 명언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나이지만 이 말만큼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경험해본 적 없는 ‘역경’을 맞이한 지금, 그 말의 의미를 더욱 깊이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를 강하게 만들었는가? 메르스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은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하고, K방역을 성공케 한 자발적 시민의식을 재확인했다고는 하나, 코로나19로 가장 큰 직격탄을 맞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할 만큼 강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우리 사회를 약하게 만들었는가? 다시 말해, 국내 첫 코로나19 사망자가 나온 곳이 하필 정신병동이었고, 하필 콜센터와 물류센터에서 악조건을 견뎌가며 일하던 사람들이 집단감염되고, 정규직의 4%가 실직을 경험하는 동안 비정규직은 넷 중 한 명이 실직한 것은 코로나19라는 역경 때문에 벌어진 비극인가?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그 모든 문제들은 이전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들이다. 비정규직은 늘 쉬운 해고의 대상이었고, 수십년 동안 폐쇄병동에 갇혀 지낸 환자들은 온갖 기저질환에 시달리다 쇠약해진 채로 사망해왔다. 단지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혹은 보려 하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본모습을, ‘너’의 감염으로 인해 나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직시하게 된 것일 뿐이다.

팬데믹이 불평등한 사회의 조명탄 역할을 해왔던 것은 이미 여러 연구결과를 통해 역사적으로 증명돼 왔다. 미국 플로리다 대학의 카이라 그랜츠 교수가 1918년 스페인 독감 대유행 당시 시카고 지역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도시 빈민과 실업자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실업률이 10% 상승하면 스페인 독감 사망률은 19.6% 높아졌다. 스웨덴에서도 스페인 독감 사망률을 직업군별로 살펴보니 저숙련 노동자-비숙련 노동자-사무직 노동자 순으로 나타났다.

2009년 신종플루 팬데믹 때는 영국 내 사망자를 전수조사한 결과 가장 빈곤한 소득 1분위의 인구 백만명당 신종플루 사망률이 12로 고소득층인 5분위 3.9의 3배가 넘었다. 영국 런던왕립대의 폴 루터 교수는 “이제까지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건강 불평등은 긴급한 사안으로 다뤄져 오지 않았지만, 다가올 팬데믹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격차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마치 코로나19에 대한 경고로 읽히는 이 논문이 나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2년이다.

코로나19는 어떨까. 이미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흑인 사망률이 백인의 4배에 달한다는 보고서들이 발표되고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충분한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아 단편적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확실한 것은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쌓여갈수록 그것이 드러낼 우리 사회의 본모습은 짐작보다 더 가혹하리란 것이다.

코로나19는 당뇨, 흡연, 고혈압 같은 기저질환과 결합될 경우 사망위험이 큰 폭으로 증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만성질환 역시 저소득층일수록 유병률이 더 높다. 고혈압의 경우 고소득층인 5분위 환자가 2011 27.7%에서 2018 23.8%로 감소하는 동안, 저소득층인 1분위에서는 27.7%에서 30.7%로 오히려 증가했다. 당뇨병은 2011년까지만 해도 1·5분위의 유병률이 10.3%로 똑같았지만, 2018년에는 1분위가 12.9%로 증가한 반면 5분위는 7.9%로 감소해 격차가 벌어졌다. 코로나19에 가장 취약한 65세 이상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43.8%에 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이다. 코로나19가 행여나 사회적 약자에게 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이미 불평등의 라인이 깊게 잘 파여 있는 셈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코로나19와 공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가 끝난다 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다가올 팬데믹을 대비하기 위해 시급히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8년 전 루터 교수의 말은 2020년에도 유효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일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이번에는 깨겠다”며 “코로나 위기 속에서 심화되는 불평등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 각오는 반드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를 약하게 만든 것은 역경 때문만이 아니지만, 역경이 드러낸 본모습을 직시한 사람에게는 적어도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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