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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숫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그들을 위해

칼럼

by 정소군 2022. 3. 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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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1번째 확진자’ ‘3번째 확진자’ ‘5번째 확진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초기에 ‘1번 환자’ ‘3번 환자’라고 불렀다가 마치 수감번호를 매기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지적에 따라 ‘1번째 확진자’로 표기를 바꿨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째’를 넣고 안 넣고가 큰 차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은 아마도 문법적 형식을 알리바이 삼은, 작은 자기위안에 불과할 것이다. 표현을 어떻게 바꾼다 한들 사람을 숫자로 기록하는 것은 폭력적인 행위이다. 번호표가 붙는 순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에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는 단지 국내에서 몇 번째로 바이러스 보유자임을 확인받았는지만이 의미가 있는, ‘감염자’로서의 존재로만 기록에 남는다.

 


누군가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절박하게 오갔을 삶의 동선은 오로지 바이러스의 이동경로가 되어 실험대 위에 올려진 실험동물처럼 낱낱이 해부당하고, 그럴 때마다 “마트는 왜 간 거지” “도대체 버스는 왜 탄 거야” 같은 원망과 탄식이 흘러나온다. 숫자로 객체화된 그는 N번째 확진자로서 바이러스를 실어 나른 매개체일 뿐이다.

누적 확진자가 세 자릿수를 넘어서면서 손가락으로 세기 어려워진 순간부터는 숫자 대신 그들을 규정하는 다른 꼬리표가 생겼다. 예를 들어 ‘신천지’ ‘콜센터’ ‘줌바댄스’ 같은 것들.

연합뉴스에 따르면 한 어린이집 관련 커뮤니티에는 자신을 어린이집 원장이라고 밝힌 사람이 ‘이 와중에 콜센터 취직했다는 학부모’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한 원아 엄마가 보험사 콜센터에 취직했다고 하는데, 교사들이 그 집 아이를 못 보겠다고 난리”라는 내용이었다. 콜센터 상담원들이 조합원에 포함된 희망연대노조는 “어떤 공공기관 콜센터는 상담원을 대상으로 대중교통 이용 여부를 전수조사하고, 앞으로 대중교통 대신 다른 (출퇴근)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상상력은 때로 ‘불필요한’ 공포를 만들어낸다. 확진자와 연관된 모든 단어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 바이러스화되어서, 콜센터 상담원은 모두 싸잡아 어린이집과 대중교통을 위협하는 ‘잠재적 감염원’처럼 다뤄진다. 확진자가 다녀간 곳은 방역당국이 즉시 소독을 하기 때문에 늦어도 이틀 후면 안전한 곳이 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이러스가 공중에 떠다니는 상상을 하면서 확진자의 동선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 역시 바로 상상력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공감력’이라는 다른 말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을 드러낼 수 없기에 지워져버린 이야기와 구조적인 맥락을 읽어내는 힘 말이다.

확진자들은 숫자가 아니다. 확진 판정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고, 대중교통을 타야 이동할 수 있으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 우리와 똑같은 일상에 발 딛고 서 있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살아가기 위한 일상의 조건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바이러스를 선택해 감염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의도 증권가 사무실의 녹즙 배달원이 집단감염이 발생한 구로구 콜센터 직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어떤 사람들은 “이제 위험해서 녹즙도 못 시켜 먹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영겁이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바이러스의 연쇄 고리를 만들어 내는 놀라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같은 사실을 놓고도 다른 현실을 떠올렸다. 새벽 5시30분에 여의도로 출근해 증권가 사무실마다 녹즙을 배달하고 오전 7시50분쯤 다시 구로구의 콜센터로 두번째 출근을 한 그의 고된 삶의 동선 속에서, 감염병이 확산되는 와중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열악한 사회적 현실을 읽어낸다.

대구에서 구급차로 확진자를 이송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소방교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확진자들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자신들도 피해자인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구급차에 오를 때는 (제가) 되레 미안해진다”고 했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은 확진자와의 싸움이 아니라 바이러스와의 싸움이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싸움을 우리는 함께 버텨내야 한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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