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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무엇을 먹지 않을 신념

칼럼

by 정소군 2022. 3. 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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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유별나지 않아요” 학교급식과 공공급식에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시민들이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식단도 훈련이다” “단체생활이 뭔지 모르나” “반찬투정도 적당히 해라”.

군 입대를 앞둔 네 명의 비건(육류뿐 아니라 계란과 우유 등 유제품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이 군대 급식에 채식 식단을 보장해 달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

 

혹시라도 내가 불친절하게 옮긴 이 반응들을 보고 비건인 분들이 상처입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이 같은 반응은 이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매일 겪고 마주하는 현실일 것이다.

채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긴 하나 아직도 채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유난스러운 취향’ 정도에 머물러 있다. 채식을 지극히 사적인 ‘취향’으로 범주화하는 순간 군대 급식에 채식 식단을 보장해 달라는 주장은 마치 ‘촌스러운 군복 무늬는 내 취향에 맞지 않으니 다른 디자인을 입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수준의 단순히 우스운 요구로 왜곡된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먹을 것인지, 먹지 않을 것인지 결정할 자유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원칙’과 ‘결심’을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인 식생활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며, 이 결심은 더욱 엄격한 실천에 옮겨질수록 삶 전체를 좌우하는 ‘신념’의 영역이 된다. 따라서 이는 사실 가장 정치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실제 최근 영국에서는 채식주의·비거니즘을 차별로부터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철학적 신념(philosophical belief)’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오른 건 호텔 종업원인 조지 코니스비가 채식주의자란 이유로 직장에서 차별을 당했다며 고용심판원에 제소한 사건이었다. 그는 채식주의도 종교나 성적지향과 같이 평등법(Equality Act·차별금지법)에 의해 보호받는 ‘철학적 신념’으로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검토한 영국 고용심판원은 지난 9월 “채식주의(vegetarianism)는 ‘철학적 신념’이 될 만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단순한 채식은 윤리적 목적부터 건강 관리를 위한 선택, 개인의 선호에 이르기까지 그 이유가 너무 다양해 하나의 ‘신념’보다 ‘생활양식’(life choice)에 더 가깝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부연설명을 달았다. “반면 비건은 채식주의자와 달리 거의 같은 이유로 비건이 된다. 이들은 대부분 동물권과 기후변화 때문에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유제품 등 일체의 육류 소비를 거부하며 일관된 실천을 한다.” 가벼운 단계의 채식은 몰라도, 비거니즘(veganism)은 철학적 신념으로 인정받을 조건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현재 고용심판원에 계류 중인 조르디 카사미자나의 사건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동물복지재단 직원인 카사미자나는 비건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며 재단을 상대로 제소했는데, 조만간 심판원의 결정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만약 심판원이 비거니즘을 평등법에 따라 보호해야 할 철학적 신념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채식주의와 비거니즘에 대한 영국 내 사회적 인식에 변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피터 싱어나 제프 맥머핸 같은 저명한 윤리철학자들은 “생명과 지구를 위해 육식을 하지 않겠다는 비거니즘의 신념이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종교적 신념과 달리 철학적 신념으로 인정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영국의 사례를 길게 소개하긴 했지만, 사실 비거니즘을 평등법의 차별금지 대상에 포함시킬지 여부는 정말 최소치의 문제일 뿐이다. 어떤 단계의 채식이든 간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신념에 반하며 살도록 강요할 권리는 없으며, 오히려 그 신념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민주사회의 기본 상식이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캐나다, 이스라엘 같은 나라들은 이미 차별금지법과 무관하게 군대에서 채식 식단을 제공하고 있다. 원하면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는 모병제 국가에서도 채식 식단을 제공하는데, 선택의 여지 없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는 징병제 국가에서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영국의 평등법이 제시하는 철학적 신념의 핵심 조건 중 하나는 이렇다. ‘민주사회에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신념이면서도 다른 이의 기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과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공장식 사육의 폐해와 과도한 육류 소비가 지구온난화에 끼치는 악영향을 줄이기 위해 채식을 실천하겠다는 신념이 민주사회에서 존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신념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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