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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종이상자 구멍조차 못 뚫어주는 첨단기술 사회

칼럼

by 정소군 2022. 3. 2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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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수많은 기자회견이 열린다. 하나같이 절박하지 않은 것들이 없다. 돌아오는 메아리 없이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목소리들이다.

하지만 최근 대형마트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제발 상자에 ‘손잡이 구멍’이라도 뚫어달라”고 호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첨단 기계를 도입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상자에 구멍을 뚫어달라는 요구라니. 어쩌다 우리 사회는 이런 ‘소박한’ 요구까지 절박하게 호소하도록 만든단 말인가.

대형마트 노동자들은 매일 무거운 상자를 수백차례씩 들고 나른다. 상자의 무게는 평균 10㎏, 최대 25㎏. 그것을 하루 평균 345회 이상 운반한다. 상자에는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하중을 분산시키지도 못한 채 그 묵중한 상자를 바닥부터 한번에 들어올려야 한다. 골병이 들 수밖에 없다.

 

마트노조가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자 손잡이 설치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마트노조 제공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지난 6월 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등 주요 대형마트 노동자 51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56.3%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고, 69.3%는 이로 인한 병원 치료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으면 신체 부담을 10~40%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구멍만 뚫으면 된다. 이쯤되면 이런 탄식이 육성으로 터져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니, 도대체 대형마트들은 상자에 구멍도 안 뚫어주고 이제까지 뭐했단 말인가.

고객의 충동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상품을 배치할 때 인체공학과 심리공학까지 동원하는 마트들이 같은 무게라도 하중이 분산되지 않으면 신체에 주는 타격이 더 크다는 간단한 물리공학조차 몰랐을 리 없다.

혹시 마트 노동자들이 손잡이 구멍을 뚫어달라는 상자가 텅스텐 합금으로라도 만들어진 것일까. 물론 그럴 리도 없다. 이들이 하루에도 345회 이상 낑낑대며 들고 나르는 최대 25㎏ 무게의 상자는 두께가 채 1㎝도 안되는, 흔히 볼 수 있는 종이상자다. GTX 열차를 놓기 위해 지하 40m 땅속까지 뚫는 이 첨단기술 사회는 고작 그 1㎝도 안되는 두께의 종이상자에 구멍조차 뚫어주지 못한다.

이러한 모순은 노동현장 곳곳에서 비극으로 되풀이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풍속 70m/s의 강풍과 진도 7.0의 지진에서 버틸 수 있는 ‘아웃리거 벨트월’ 시스템을 적용하고 초고강도 강재 ‘HSA800강’을 사용해 지어진 부산의 101층짜리 초고층건물 엘시티의 초정밀 과학에 ‘일하는 사람’은 빠져 있었다”고 지적했다(한겨레 10월2일자 칼럼 ‘거대한 공동의 묵인’). 지난해 5월 이 건물을 짓다가 외부 유리 작업을 하던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바람과 지진에 이긴다는 초강재와 초첨단 기술 현장에서 (안전작업 발판과 벽면을 연결해주던) 간단한 고정장치가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비자와 자본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첨단기술의 혜택이 현장 작업 노동자의 안전을 향상시키는 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 같은 현실은 우리에게 기술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를 되묻게 한다. 하긴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기술의 발달로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라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거리낌 없이 발언하는 사회에서 그 기술을 노동자를 위해서도 써 달라는 요구는 사치일지 모른다.

해외에서는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작업 현장에서 인공지능(AI)과 드론 같은 첨단기술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시도되고 있다. 최근 싱가포르 주택개발청은 지상 2m 이상 높이에서 작업하는 건설 노동자들이 추락 방지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지 않은 위험지점 1m 이내로 접근하면 경고음이 울리도록 하고, 드론이 찍은 수천장의 현장 사진을 AI가 분석해 위험 요소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시스템을 시범도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례들이 우리에게는 허무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한국 사회의 산재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본을 지키지 않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20㎏ 무게의 쌀과 음료수 상자를 나르느라 요추, 경추 간판 탈출증 진단을 받아 4개월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손잡이가 있으면 조금이나마 무리가 덜 갈 것 같습니다” “상품이 가득 든 상자 바닥을 잡고 들어야 하니 자세가 구부러지고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너무 많이 갑니다. 손잡이가 있으면 좀 더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자에 손잡이 구멍조차 안 뚫어주는 이런 사회에서 무슨 안전을 기대할 수 있겠나. 마트 노동자들이 ‘나에게 손잡이가 필요한 이유’라는 자필 손편지까지 쓰게 만들다니, 기업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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