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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내가 본 것의 위대함

칼럼

by 정소군 2022. 3. 2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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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우유니의 소금사막은 4년 전 남미여행을 떠날 때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였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봤던 파란 하늘, 흰 구름이 데칼코마니처럼 고스란히 물 위에 반사된 장면은,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감동을 선사했다.

수도 라파스에서 출발하는 밤 버스를 타고 우유니에 새벽 5시30분쯤 도착했다. 그 작은 도시에 한국인들이 바글바글했다. 보통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거나 그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액티비티가 정말 재밌거나 하면, 그곳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우유니는 특유의 몽환적인 풍경과 함께, 일종의 액티비티 경지에 오른 ‘인생샷 건지기’ 덕분에 한국인이 가장 꿈꾸는 여행지 중 하나가 됐다.

우유니 소금사막은 아주 먼 옛날 바다가 지각변동으로 솟아오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조한 기후로 인해 물은 모두 증발하고 소금 결정만 남아 형성된 것이다. 우기인 12~3월에는 20~30㎝의 물이 고여 얕은 호수가 만들어지는데, 이 물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반사되면서 하늘과 땅이 일체를 이뤄 장관이 연출된다. 그 신비로운 풍경 한가운데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반드시 사진으로 박제하고 말리라, 전의를 불태웠다.

 

우유니


하지만 계획은 우유니에 도착한 순간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12월 우기였는데도 비가 거의 오지 않아 하늘과 뭉게구름을 반사시켜줄 물(!)이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은 온통 쩍쩍 갈라진 메마른 소금밭뿐. 볼리비아에 점점 가뭄이 잦아지면서 소금사막에 물이 부족해지고 있다더니 사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소금사막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투어 가이드의 능력 여부는 넓디넓은 소금사막 에서 물이 있는 곳을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누가 장소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 사진을 잘 찍어준다더라’ 하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한국인 여행자들이 그 가이드와 투어를 떠나려고 줄서서 대기하기도 한다.

우리 팀의 가이드는 소금사막의 뜨거운 직사광선과 거친 바람 탓에 얼굴에 일찍 노화가 와서 서른세 살인데도 쉰이 다 돼 보였다. 작은 인형 소품을 들고 와서 이런저런 착시 사진도 열심히 찍어주고, 풍경이 예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도 해줬다. 하지만 그게 내 눈에 찰 리 없었다.

남미여행을 결심한 가장 큰 동기가 우유니 소금사막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대에 미치지 못한 곳이 됐다. 큰맘 먹고 한번 오기도 어려울 이곳에서의 소중한 기회를 그렇게 날린 것이 너무 아깝고도 아쉬워서, 그 후로 나는 누군가 우유니 소금사막 얘기만 꺼내면 속으로 혼자 쓴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여정의 마지막 도시였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1만시간 동안의 남미>(플럼북스)란 책을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그 책의 저자가 우유니를 묘사한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우유니’를 원망했던 것이 갑자기 미안해졌다.

“소금사막이 만들어지는 1억년 동안 공룡이 사라졌으며, 인류가 생겨났다. 나는 허무함 뒤로 밀려드는 억겁의 인연을 생각했다. 소금사막을 만나기 위해 박민우라는 인간은 서른세 살을 못 견디고 한국을 떠났으며 이 땅은 꾸준히 바다를 벗어나 땅으로 땅으로 솟구쳤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지프가 뒤집히지도 않았다. 변심해서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이곳이 온난화로 모두 녹아버리지도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70년 정도의 인생. 그 안에 허락된 인연은 얼마나 될까. 영원할 것 같던 바다가 사라지고 소금만 남았듯이 지구상에 불멸은 없다. 이 일렁이는 소금도 언젠가는 바다가 되거나 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보여지는 순백의 기적에 진심으로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내가 보고 실망했던 우유니의 하얀 소금사막은 그런 ‘억겁의 기적과 인연’을 거쳐 만난 곳이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을 느낄 시간에 내가 본 것의 위대함에 감사해야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여행자의 자세라는 것을 그 글을 읽는 순간 깨닫게 됐다.

2019년의 여정도 어느덧 끝나간다. 한 해의 끝에 선 심정이 보람과 뿌듯함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2개월 전 품었던 기대와 희망은 소금사막같이 버석한 현실 앞에서 이미 오래전 실망과 체념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마다 나의 우유니를 떠올린다. 내가 보고도 보지 못했던 것들. 내가 경험하고도 하찮게 여긴 기적들. 딱히 좋은 일 하나 없는 것 같은 나의 2019년에도 분명 ‘억겁의 기적과 인연’을 거쳐 만난 풍경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2019년을 버텨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싶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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