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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댓글을 조작할 순 있어도 여론은 조작될 수 없다 (2018.4.24)

칼럼

by 정소군 2022. 3. 2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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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언론이 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이기도 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기자들이 여론을 파악하는 척도로 ‘누리꾼 댓글’을 진지하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인터넷 세대’는 이미 부상하고 있었지만, 언론은 생각보다 그리 변화에 재빠르지 못하니까.

그해 말, 인터넷에서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미선이·효순이를 위해 추모의 촛불을 켜자는 어느 누리꾼의 제안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반신반의하던 언론은 실제로 서울 광화문에 촛불을 든 인파가 몰려드는 것을 보고 그제야 인터넷 여론에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신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시민 반응을 따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는 ‘원시적’인 방식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누리꾼의 댓글은 훨씬 더 쉽고 정확하게 여론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여론을 파악한다는 것은 숲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는 말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내로라하는 갤럽 전문가들이 정교하게 짠 선거 예측 여론조사 결과들이 괜히 빗나가는 것이 아니다. 여론조사는 표본을 어떻게 잡느냐,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2016 4·13 총선 때도 여론조사 기관들은 한결같이 새누리당의 압승을 예상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민주당의 승리 아니었던가.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여론이다. 그래서 문제는 여론 측정의 실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알면서도 부정확한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확대재생산하는 행태에 있다.

하물며 댓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수많은 댓글 중 무엇을 골라 쓸 것인가. 언론은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댓글만 뽑아쓰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정치인들은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 퍼뜨리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유혹이 바로 사이버 정치 브로커를 등장시킨 토양이 됐다. 즉 문제는 댓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메커니즘에 있다.

현재 한 광역단체장 후보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ㄱ씨는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드루킹 같은 사이버 정치 브로커들이) 단순히 댓글만 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한 명의 정치 브로커가 여러 개의 블로그와 인터넷 언론 등을 동시에 운영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사실상 같은 집단에서 운영하는 여러 인터넷 언론사가 서로서로를 인용하면서 ‘좋아요’를 눌러주고, 중앙 언론사의 온라인뉴스팀 같은 곳에서 그 기사를 받아 쓸 경우엔 ‘유명 언론사가 우리 기사를 인용했다’며 또 인용보도하는 무한반복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그러진 거울이 실제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는 없는 것처럼, 댓글이 여론을 만들 수는 없다. 댓글을 조작할 순 있어도 여론을 조작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의 이 믿음은 2015년의 기억에서 비롯됐다. 그 무렵, 인터넷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더 많은 보상금을 노리고 농성을 하는 것이란 글이 흘러넘쳤다. 박근혜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방송들과 보수언론이 이런 반응들을 골라 보도하면, ‘일베’ 같은 사이트가 다시 이를 퍼가서 증폭시키는 무한반복이었다. 소수의 왜곡된 시선이 마치 근저에 깔려 있는 진짜 숨은 여론인 양 호도되자, 나는 잠시 의심을 했던 것 같다. 다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회적인 재난 앞에 모두가 애끓는 심정이겠거니 여겼지만, 사실 내 예상과 달리 침묵하는 다수는 보상금을 노린 것이란 생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어느 빅데이터 업체가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세월호’가 언급된 1500만건 이상의 문서를 분석해 내놓은 결과를 보고 깨달았다. ‘세월호’에서 사람들이 떠올린 연관어들은 ‘눈물’ ‘자식’ ‘참사’ ‘실종자’ 같은 것들이었다. 그 수많은 연관어 속에 ‘돈’ ‘보상금’ ‘빨갱이’ 같은 단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유족에 덧칠을 하려던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더 적었고, 소수였고,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한줌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진짜 여론에 의해 탄핵을 당했다.

‘더불어민주당원 댓글조작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드루킹’은 지난해 4월24일 대선이 한창이던 당시 이런 글을 올렸다고 한다. “두 번의 TV토론으로 문재인이 2위 주자와 격차를 크게 벌렸는데 그 여론을 우리가 만들었다.” 자신들이 온라인 여론을 압도적으로 점유해 대통령 지지율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다. 추운 겨울, 촛불을 들고 광화문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의 민심을 모욕하는 헛된 망상이다. 댓글이 여론을 만든다면, 그것은 댓글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을 악화시키는 형태로나 가능할 것이다. 결국 끊이지 않는 ‘댓글 스캔들’의 원인은 댓글 따위로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정치판의 오만함이 아닐까.

<정유진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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