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정유진의 사이시옷]‘빙판 위의 메시’도 타지 못하는 버스 (2018.3.30)

칼럼

by 정소군 2022. 3. 22. 12:55

본문

1984년, “서울거리 ‘턱’을 없애주시오”란 유서를 남기고 휠체어 장애인 김순석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다섯살 때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었지만 누구 못지않은 성실함으로 액세서리 공장장이 됐다. 1980년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된 후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문을 받고 물건값을 회수하기 위해 휠체어를 탄 채 부지런히 남대문 시장 골목을 누볐다.

그런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턱’이었다. 비장애인은 느끼지 못하는, 그러나 휠체어 장애인에게는 그 어떤 장벽보다 높은 그 작은 턱. 목숨을 끊기 두달 전, 김씨는 교통단속에 걸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공구를 빌리러 성수동에 가던 길에, 거리의 턱 때문에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어 경사로가 있는 차도 쪽을 이용했다가 무단횡단으로 단속된 것이다.

그 순간 오랫동안 참고 눌러왔던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터져버린 듯했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다.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 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그의 죽음으로부터 34년의 시간이 흘렀다. 2018년의 평창, 지금 그곳에서는 장애를 극복한 ‘영웅’들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어릴 적 앓았던 류머티즘으로 30살 때 왼쪽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주장 한민수 선수가 의족을 찬 채 성화봉송대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을 등반하자 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평창을 찾은 장애인들은 아마 익숙지 않은 친절함과 환대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미소 띤 자원봉사자들이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주위에 대기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인색한 미디어가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삼는 유일한 때가 4년마다 딱 2주씩 돌아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러나 1984년과 2018년의 한국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장애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썰매를 탄다>를 봤다. 그들은 서로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며 신나게 웃고, 막 시작한 연애 때문에 설레고, 승부욕 때문에 손가락 부상을 숨기는, 그저 평범한 청춘이자 근성 있는 운동선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빙판 위를 거칠 것 없이 질주하던 선수들은 경기장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누군가의 등에 업혀야만 버스를 탈 수 있는 ‘장애인’으로 돌아갔다. 버스 계단의 턱이 너무 가파른 탓에 업고 오르던 사람이 휘청거리자, 업힌 사람도 업은 사람도 서로 멋쩍어 쿡쿡거리다가 결국 자조 섞인 말을 내뱉고 만다. “이거, 웃을 일이 아닌데. 정말 웃을 일이 아닌데.” 언덕을 등반해 성화봉송대에 오르고, ‘빙판 위의 메시’가 되어도 여전히 버스와 지하철 앞에서는 멈춰설 수밖에 없는 2018년의 현실.

그래서 우리가 패럴림픽의 드라마에서 봐야 하는 것은 장애를 극복한 선수들의 투혼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감동만이 아니다. 패럴림픽은 장애가 있어도 저렇게 빛날 수 있는 사람들이 왜 일상에서는 그러기 힘든 것인지, 우리가 만든 사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오래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것을 보면 장애를 극복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물론 장애 극복에 대한 것을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장애인의 문제를 그렇게 이미지화하고 있다는 거죠.”

박 대표는 장애인 시외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며 고속버스에 쇠사슬을 묶고 여러 건의 미신고 집회를 주최한 혐의 등으로 징역 2년6월을 구형받은 상태다. “아름답거나 혹은 동정의 대상이어야 할” 장애인들이 쇠사슬을 묶고 철도와 도로를 점거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쇠사슬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세상이 우리 장애인들에게 만들어 놓은 일종의 함축된 ‘형상’이죠. 쇠사슬을 풀기 위해서라도 묶는 거예요. 지금은 그 쇠사슬이 경찰들에게 잘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스스로 잘라내겠다는 표현입니다.”

다시 김순석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아니면 횡단보도로 건널 수 없게 만든 사회가 문제였던 것일까. 박경석 대표는 평창 동계패럴림픽 성공을 위한 국제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몇달 전부터 평창으로 갈 수 있는 이동수단을 구하려 애를 썼지만, 휠체어 장애인을 태울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어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는 왜 ‘범법자’가 돼야 했을까. 버스에 쇠사슬을 묶은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아니면 시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쇠사슬을 묶을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가 문제였던 것일까.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