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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1996년의 미국과 2022년의 러시아 (2022.2.24)

칼럼

by 정소군 2022. 4. 2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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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은 이 같은 상황이 ‘뉴노멀’이 됐다고 말했다. ‘신’냉전이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21세기의 일상이 될 것이란 암울한 예측이다.

 
러시아는 동독 국경 너머로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1990년의 구두 약속을 서구가 먼저 깨뜨렸다면서, 양보 불가능한 협상 조건으로 나토의 동진을 멈추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핑계일 뿐이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진짜 속내는 소련 제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야욕이란 의구심이 커지고 있지만,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까지 팽창해 온 나토로 인해 러시아가 느낄 위협감 또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논란의 불씨가 된 나토의 동진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러시아가 설마 이렇게까지 나오리라 예상치 못하고 내린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예상하고도 그 모든 걸 각오하고 내린 결정이었을까. 그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1996년의 미국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1999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해는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2년 전 열린 하원 선거에서 크게 패한 민주당은 48년 만에 가장 많은 의석을 공화당에 빼앗겼다. 후끈 달아오른 선거판에서 공화당 대선 주자인 밥 돌 상원의원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출신인 밥 돌은 동유럽 국가의 나토 가입 문제를 놓고 클린턴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나토의 동진은 당시에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국제관계학 권위자인 마이클 만델바움을 비롯해 냉전 시절 소련의 팽창주의 노선에 맞서 ‘봉쇄정책’을 입안했던 외교관인 조지 케넌까지,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은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는 ‘치명적인’ 결정이 될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클린턴은 선거 레이스가 시작되자 밥 돌과 경쟁하듯 나토 확장 공약을 내걸기 시작했다. 밥 돌이 “클린턴은 명확한 타임테이블을 내놓지 않고 이 문제를 질질 끌고 있다”고 공격하자, 클린턴은 곧 이렇게 응수했다. “1999년까지 폴란드, 헝가리, 체코는 우리가 나토에 초대할 동유럽 국가의 첫번째 그룹이 될 것입니다.”

사실 나토의 동진을 둘러싼 클린턴과 밥 돌의 선명성 싸움은 그해 대선에서 대표적인 ‘스윙 보터’로 떠올랐던 폴란드계 미국인의 표심을 잡기 위한 경쟁이기도 했다. 치열한 격전지였던 중서부 지역의 미시간, 일리노이, 위스콘신주에서 폴란드계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9~10%에 달했다. 클린턴이 1999년까지 폴란드 등을 나토에 가입시키겠다고 발표한 곳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였다. 클린턴은 그 연설을 마친 후 폴란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폴란드식 만두인 ‘피에로기’를 먹는 장면을 연출했다. 당시 시카고트리뷴은 “클린턴과 밥 돌의 나토 동진 공약은 폴란드계 표를 얻기 위해 세계 안보를 희생시키려는 매우 나쁜 정치이고 위험한 전략”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앨빈 루빈스타인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 교수는 ‘나토 동진의 기원과 함의’라는 글에서 “구소련에서 독립한 동유럽 국가들이 나토 가입을 염원해 오고 있긴 했지만,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은 유럽이 아닌 미국에 있었다”면서 “그리고 미국의 나토 동진 결정에 기폭제가 된 것은 세계 안보 위협이 아닌 국내 정치적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나토의 팽창으로 21세기의 유럽은 20세기보다 더욱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클린턴 정부 사람들은 과연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만 내부의 동력이 외부를 결정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또 그것이 언제나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것은 2022년의 러시아에 가장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의 2020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크림반도 강제병합 이후 오랫동안 격화돼 온 대립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고 답한 러시아인의 비율은 79%에 달했다. 또 응답자의 67%는 서방을 ‘파트너’로 대해야 한다고 했고, ‘친구’로 대해야 한다고 답한 사람도 11%에 달했다. ‘적’이라고 답한 사람은 3%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원인으로 나토와 우크라이나를 지목한 사람이 66%였지만, ‘돈바스 지역의 친러 반군을 위해 러시아가 무력 개입해야 하냐’는 질문에는 43%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문제는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가 2024년으로 아직 한참 남았다는 점이고, 더 큰 문제는 전제주의의 길로 가고 있는 푸틴에게 더 이상 선거와 내부의 목소리는 의미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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