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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70도 경사로가 30도로 낮아진들

칼럼

by 정소군 2022. 5. 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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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에서 화제가 된 BBC 드라마 한 편이 있다. 제목은 <바버라가 앨런을 만났을 때>. 방영된 지 벌써 한 달 넘게 지났지만, “프라임타임 TV에서 이런 드라마를 보게 될 줄 몰랐다”는 놀라움과 감동의 후기들이 이어지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영국 장애인 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바버라 리시츠키와 앨런 홀즈 워스. 영국 최초의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바버라는 1989년 휠체어 장애인이자 뮤지션인 앨런 을 만난다. 앨런은 카바레 무대 아래서 음악을 연주하고, 바버라는 무대 위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다. 드라마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장애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함께 투쟁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바버라가 앨런을 만났을 때> 드라마 한 장면. /BBC


드라마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바버라가 영국 ITV 아침 프로그램인 <디스 모닝>에 출연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MC인 필립 스코필드가 바버라에게 꺼낸 첫마디는 예상과 달리 드라마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정중한 사과였다.

“이렇게 쇼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는데…, 먼저 바버라에게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게스트를 모셔올 때 이용하는 렌터카 업체가 저희의 사전 당부에도 불구하고 (휠체어 장애인인) 바버라가 탈 수 없는 차를 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바버라가 제시간에 방송사에 도착할 수 없어 쇼의 순서도 급하게 바꿔야 했죠.”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장애인 문제에 있어) 얼마나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네요.”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바버라와 앨런이 본격적으로 장애인 인권운동에 뛰어든 것 역시 ITV의 한 방송 프로그램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말이다.

정확히 30년 전인 1992년, 바버라와 앨런을 비롯한 1000여명의 장애인 활동가들은 “동정 따윈 엿이나 먹어라”(Piss on Pit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ITV 스튜디오 앞으로 몰려들었다. 자선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27시간 연속 진행되는 텔레톤(텔레비전과 마라톤의 합성어) 방송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방송은 ARS 모금 전화를 유도하기 위해, 불쌍한 장애인들이 선량한 이웃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장면을 연출해 27시간 내내 내보냈다.

“우리는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당신들과 동등한 시민이다!” 장애인 시위대는 이렇게 외치며 도로를 점거하고, 텔레톤 출연자들이 방송사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현관을 가로막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모금’이 아니라 ‘세금’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바버라와 앨런은 ‘장애인 직접 행동 네트워크’(DAN)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DAN은 장애인이 탈 수 없는 버스와 기차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를 점거했다. 장애인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 공공기관, 미술관, 백화점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사회가 이들의 외침에 응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ITV는 1992년을 끝으로 텔레톤 방송을 폐지했다. 1995년에는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됐다. 허점이 많다는 지적을 받았던 이 법은 2010년 제정된 평등법(Equality Act·차별금지법)으로 확대 통합된다.

이쯤이면 이 드라마의 결말을 해피엔딩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바버라는 2015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차별금지법도 제정됐으니 결국 우리가 승리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겁니다. 그건 결코 승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해낸 것은 차별이 실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가 겨우 인정하게 만든 것에 불과하니까요.”

이는 과거보다 이만하면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는 인터뷰를 준비했다가 사과부터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던 <디스 모닝>의 해프닝이 증명한다.

차별을 없애는 데 있어 ‘이만하면’이란 말은 통하지 않는다. 70도 경사로가 30도로 낮아진다해도 휠체어가 올라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평등법도 제정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너무나 당당하다. 휠체어 장애인들은 지하철 바닥을 기면서 온몸으로 투쟁하고 있는데 정치인이라는 사람은 기획재정부 탓만 하면서 장애인들을 꾸짖고, 국회 앞에서는 평등법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이 이어지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은 자기들끼리 육탄전을 벌이느라 바빠 관심조차 없다.

우리야말로 아직 갈 길이 멀다. 그걸 안다면 정부와 국회가 이렇게 느긋해선 안 된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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