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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모든 전쟁은 어린이를 향한다 (2022.3.31)

칼럼

by 정소군 2022. 4. 2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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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에서 5세 소년 라얀이 32m 깊이 우물에 빠졌을 때 전 세계 소셜미디어에서는 ‘라얀 구하기’(#Save Rayan) 운동이 펼쳐졌다. 구출 작업 상황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고, 그걸 지켜보던 누리꾼들은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나흘 만에 구조된 라얀이 결국 숨을 거두자, 세계 각국 정상과 대사관들은 일제히 애도의 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정유진 국제에디터한 소년의 생명 앞에 전 세계가 한마음이 됐던 그때와 지금은 과연 같은 세상이 맞을까. 전쟁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지만, 한 아이의 생명 무게는 전쟁 전에 비해 0.001g도 더 가벼워지지 않았다. 불과 몇 주 만에 이 세계는 우크라이나에서 꺼져간 수백 명의 어린 생명과, 가족과 생이별한 채 낯선 나라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백만 명의 아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더 ‘용맹’해진 것일까.

15세 우크라이나 소녀인 마샤는 포탄에 맞아 자포리자 병원으로 실려왔다. 한쪽 팔에는 철심을 박았고, 얼굴은 아직도 피딱지투성이다. 수술에서 깨어나 한쪽 다리가 절단됐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부터 마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BBC 카메라에 비친 마샤는 살 의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다.

두개골에 포탄의 파편 조각이 박힌 6세 소년은 병원 의사에게 엄마가 차 안에서 불타 죽는 모습을 봤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이제 난 누구 손을 잡고 학교에 가요?”
 
 
 


 
그러나 사실 세계는 바뀐 것이 아니다. 모로코 소년의 죽음에 전 세계가 애도하던 그 순간에도 팔레스타인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얀마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어갔다. 2018년 세이브더칠드런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어린이 6명 중 1명은 분쟁 지역에서 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발발한 지금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모든 전쟁은 정의롭든 정의롭지 않든, 승리했든 패배했든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다.” 100여년 전 세이브더칠드런 창립자인 에글렌타인 젭이 한 말이다.

지난해 5월 팔레스타인에서는 열흘간 이어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256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4분의 1은 어린이였다. 당시 한 중동 매체가 올린 영상에는 폭격을 당해 부서진 집 앞에서 물고기가 든 작은 어항을 소중하게 들고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집에서 구해온 거예요. 이제 새들을 구하러 다시 돌아가봐야 해요.”

연일 집 주변에 떨어지는 미사일로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한 와중에도 작은 생명체를 구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며 누군가는 전쟁도 파괴하지 못한 동심에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의 회복력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어른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의 아이들을 보면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라 너무 견디기 힘듭니다.” 미국 CBS 카메라 앞에 앉은 한 노부부는 어린아이처럼 울먹였다. 여섯 살 때 이탈리아에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이들은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를 찢는 공습 사이렌, 폭격을 피해 산속으로 밤새 달리고 또 달렸던 그날의 추운 밤에서 이들은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했다며 울었다.

전쟁이 나면 아이들은 약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죽고, 운 좋게 살아남아도 살아갈 날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더 길게 고통받는다.

이 전쟁들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외교적 해법은 요원해 보이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 더 큰 전쟁을 일으키라고 말할 수도 없다.

“모든 전쟁은 정의롭든, 정의롭지 않든 어린이를 향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전쟁을 멈추라고 목소리를 내는 일에 지치지 않는 것, 그리고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분쟁 지역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 아이들이 손이 닿지 않는 너무 먼 곳에 있는 것 같은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으로 너무 쉽게 잊히지만, 아직도 카불 공항의 공포와 아수라장이 선연하다. 그곳을 힘겹게 빠져나와 한국으로 온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얼마전 울산에서 학교에 입학했다. 그 아이들이 이 땅에서 트라우마를 딛고 평화롭게 커갈 수 있도록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 역시 우리가 전쟁 속의 아이들을 지키는 데 일조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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