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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제약계 로비 속에서도 힘 받는 코로나 백신 지재권 면제 목소리 (2021.4.28)

국제뉴스/코로나

by 정소군 2022. 4. 1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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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지재권) 면제 요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개도국의 요구를 외면해 왔던 미국도 우방국인 인도가 ‘코로나 지옥’에 빠지는 등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처음으로 지재권 면제를 검토 중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제약사의 로비도 더욱 치열해지고 있어 오는 30일 열릴 세계무역기구(WTO)의 지식재산권협정(TRIPS·트립스) 회의에서 어떤 논의가 오갈 지 주목된다.

■힘 받는 지재권 면제 요구, 치열해진 제약계 로비전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27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지재권 면제를 포함해 저렴한 비용으로 백신 생산·공급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지재권 면제보다) 미국에서 백신 생산을 증대시키는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 뭐가 가장 합당한지 평가해야 한다”면서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는 모두 트립스협정에 따라 20년 동안 특허 보호 대상이다. 이를 두고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한 100여개국은 개도국도 백신과 치료제를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지재권 적용을 한시적으로 면제해 줄 것을 WTO에 요청해 왔다. 옥스팜 등을 비롯한 국제 비영리단체들도 빈국들이 대유행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백신 특허를 일시 중단시켜야 한다는 압력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화이자 등 백신을 개발한 제약사들은 특허권 면제를 강력 반대하고 있다. 전날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이들은 지재권 면제가 백신의 안전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개도국의 백신난은 접종 인프라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고 맞섰다.

제약사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 주요국의 정부 관계자 등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 미 탐사보도 매체인 ‘인터셉트’는 미국이 지재권 면제 청원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하기 위해 정·관계 인사들과 접촉 중인 로비스트가 100여명에 달한다고 지난 24일 보도했다. 이 중에는 전직 USTR 관계자와 민주당의 핵심 정치자금 모금책이었던 마이크 맥케이 등 정계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인터셉트는 제약계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미 상공회의소와 최고경영자(CEO)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등도 지재권 면제를 막기 위해 수십명의 로비스트를 자체적으로 고용했다고 전했다.

영국에서도 보리스 존슨 총리가 제약사의 로비를 받고 지재권 면제 요구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영국 양당 의원들은 존슨 총리와 장관, 고위 공직자들이 제약사와 주고받은 e메일·문자·메신저 대화내용을 모두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극명히 드러난 트립스협정의 한계

미국과 영국 등 글로벌 제약사가 있는 주요국들은 이제까지 진행돼 온 WTO 회의에서 지재권 면제가 백신 생산량 증대로 이어지기 어렵고, 트립스 협정은 이미 건강권과 특허권의 균형을 위해 유연한 적용을 허용하고 있다며 지재권 면제에 반대해왔다.

실제 트립스협정에는 각국 정부가 공익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면 특허권자의 허락 없이도 강제로 복제약을 만들 수 있게 한 강제실시권(compulsory license) 조항이 들어있다. 하지만 강제실시권을 사용하려면 추후 주요국의 무역 제재나 글로벌 거대 제약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감수해야 한다. 국내 환자단체들이 2003년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2009년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의 강제실시를 요구했으나 특허청이 이를 두번 다 기각했던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저가 약이 가장 절실한 저개발 국가들은 강제실시권을 사용해봤자 복제약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추지 못해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다. 강제실시로 만들어진 복제약은 반드시 해당 국가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트립스 협정 조항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강제실시권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저개발국가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같은 부자나라였다.


이 같은 사실이 논란이 되면서, 2001년 도하라운드에서 개정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2005년 강제실시로 만들어진 복제약을 제약기술이 부족한 저개발 국가에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규정이 삽입됐고, 이 조항은 2017년부터 발효됐다.

하지만 여기에도 까다로운 조건들이 붙었다. 강제실시 복제약은 정확히 최소 필요량만큼만 수출해야 하고, 수출국은 복제약이 반드시 수입국 안에서만 사용되도록 감시해야 한다는 단서 등이 달린 것이다. 인도 남아시아대의 프라바쉬 란잔 교수는 “이는 ‘규모의 경제’에 부합하지 않아 결국 저소득 국가로의 복제약 수출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면서 “트립스협정에 있는 유연성 조항은 모두 실효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코로나19 상황의 시급성을 고려하면 지재권을 면제하고 기술을 이전해 세계 각국의 제약사들이 동시에 백신 생산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WTO 협정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WTO 회원국 4분의 3이 찬성할 경우 지적재산권 등 WTO 회원국에 부과된 의무를 포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인도와 남아공 등 개도국들은 코로나19 대유행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예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냐고 되묻고 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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