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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파국’ 사이, 엘리트들의 ‘교묘한 배신’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2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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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엘리트 독식 사회
ㆍ아난드 기리다라다스 지음·정인경 옮김
ㆍ생각의 힘 | 424쪽 | 1만8000

호화 유람선 위에서 열리는 서멋앳시(왼쪽 사진)나 다보스, 선밸리 등의 국제 콘퍼런스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성공한 기업가들로 늘 북적인다. 그러나 선의로 무장한 엘리트가 늘어가는데도 빈부격차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 서멋앳시 페이스북



세상을 구하는 ‘윈윈주의’ 복음 속

실상은 불평등의 공범된 엘리트

이들의 이상한 논리는

‘지식 소매상’에 의해 묘하게 포장

표면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켜

실제로는 불변의 결과를 도출해

승자독식 사회를 합리화하며

‘마켓월드’의 이야기더미에 편승

영화 ‘기생충’의 파국적 결말처럼

가해자 없는 비극은 더욱 비극적


 

빈부격차를 다룬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파국적 결말로 끝나는 <기생충>의 포스터 캐치프레이즈가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엘리트 독식 사회>는 ‘나눔’과 ‘파국’ 사이에 생략된 맥락을 날카롭게 짚어주는 책이다. 저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애쓰며 선행을 베푸는 엘리트들이 너무 많다 보니, 만일 이들 모두가 한꺼번에 뛰기라도 한다면 지구의 축이 기울 정도”인데도, 세상이 나아지기는커녕 불평등이 더욱 심각해져가는 이유를 파헤친다.

이 책은 이미 익숙하지만 볼 때마다 놀라게 되는 통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국 상위 10%의 평균 세전 소득은 1980년 이래 2배가 됐다. 상위 1%의 소득은 3배 이상 증가했으며, 상위 0.001%는 7배 이상 증가했다. 반면 하위 50%의 평균 세전 소득은 거의 정확하게 동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달리 말해 지난 35년 동안 벌어진 경이로운 기술 혁신에도 불구하고 “1억1700만 미국인은 1970년대 이래 경제성장에서 완전히 차단돼 있다”.

몰아치는 분노에 직면한 일부 엘리트들은 벽 뒤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최근 몇년간 꽤 많은 미국의 부자들이 “그 자체로는 칭찬할 만한 것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기 잇속을 차리려는 속셈을 가진 어떤 일”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열렬한 지지자’를 자처하면서 세상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실제 오늘날 미국의 엘리트들이 역사상 가장 많은 ‘사회적 배려’를 하는 엘리트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거액을 쾌척해 재단을 만들거나, 자신들의 전문성을 발휘해 저소득층을 돕기 위한 다양한 공익사업을 벌인다. 그러나 이들이 인자한 것은 ‘선을 넘지 않을 때’만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억만장자 벤처 자본가인 비노드 코슬라는 불안정 노동으로 소득이 들쑥날쑥한 저소득층을 돕기 위해 ‘이븐’이라는 벤처기업에 자금을 투자했다. 소득 변동이 심하면 공과금과 집세를 내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븐’은 이들이 평소보다 더 벌면 번 돈의 일부를 저장해뒀다가 수입이 줄어들면 저장해둔 돈으로 보충해줌으로써 소득을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 그 대가로 이용자에게 연간 260달러의 수수료를 떼간다.

‘이븐’의 사업에 “고귀한 의도”가 넘쳐났을지는 몰라도, 그 결과로 저소득층의 수입은 오른 게 아니라 단지 들쑥날쑥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불안정 노동자를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돈을 더했다 뺐다만 해준 후 260달러의 수수료를 챙겨가는 것일 리 없다.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불안정한 리스크를 노동자에게 모두 떠넘기는 시스템 자체를 수선하거나 공적인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뉴욕의 헤지펀드에서 잔뼈가 굵은 스테이시 애셔는 탄자니아를 여행하다 고아원에 버려진 불쌍한 아이들을 목격한다. 그는 아프리카의 고아들을 돕기 위해 ‘판타지 스포츠’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수익금을 게임의 승자가 원하는 자선단체로 보내는 사업이다. 그러나 그는 벌처펀드가 편법을 이용해 탄자니아 정부로부터 거액을 약탈해가는 일에는 눈을 감는다. 이런 수상쩍은 금융 관행을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탄자니아 정부의 사회적 지출을 확대시킴로써 고아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데도 말이다. 애셔는 금융시장의 약탈적 관행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할 뿐 아니라 연줄도 든든하고 선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엘리트가 세상을 돕는 것은 오로지 시장친화적으로, 승자의 권력 방정식을 절대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이뤄진다. 저자는 이를 ‘마켓월드’라 부른다. 현 상태로부터 이익을 얻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일도 해내는, 신흥 권력 엘리트의 세계다. 무능한 정부보다 약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욱 유능한 ‘행동하는 비즈니스’. 우리가 수익을 내면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커지고, 그것이 결국 세상에도 이롭다는 믿음. 이것이 새로 등장한 ‘윈윈주의’라는 복음이다.

‘윈윈주의’를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빈자를 덮치는 고난의 파도가 당장 잔잔해질 가능성이 낮다면, “파도를 타면서라도 버틸 수 있게” 엘리트가 도와주는 것을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구원자’를 자처하는 엘리트는 “애당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세상에 그렇게 많아진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외면한다.



저자는 세상을 바꾸려는 부자들이 모여 ‘윈윈주의’의 복음을 전파하는 콘퍼런스 중 하나인 ‘서밋앳시’에서 목격한 장면을 생생히 그려낸다. 서밋앳시가 열리는 호화 유람선 위에 모인 이들은 다른 사람의 삶을 개선하겠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상 개선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몫뿐이라는 인지부조화를 완화하기 위해 스스로의 위치를 ‘반란군’의 자리에 놓는다. 반란군은 책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버와 에어비앤비에 투자해 갑부가 된 셔빈 피셔바는 자신을 부패한 시스템에 대항하여 싸우는 ‘약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강연한다. “나에게 가장 버거운 것은 택시 카르텔 같은 기성의 구조와 독점입니다. 우버와 다른 회사들이 이룩한 새로운 기술과 혁신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도덕적 견지에서 우리는 그들과 싸울 책임을 안고 있습니다.” 피셔바는 벤처 자본가와 억만장자 기업가들을 “기성 제도와 맞서 싸우는 투사로 캐스팅”했을 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고 평등을 촉진하기 위해 존재하는 노조에는 ‘카르텔’이라는 악역을 할당”했다.

이들은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상이한 사회계급이 존재하며,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국가는 상이한 종류의 욕구를 대표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윈윈’의 시대에 고통은 혁신될 수 있다. 혁신을 일구는 이들이 창업하게 하라. 기업가 정신을 가진 벤처들이 저마다 다른 사회문제를 떠맡아줄 것이다. 부자들이 돌려주도록 고취하되, 결코 덜 가져가라고는 말하지 말라. 부자들이 해결책에 동참하라고 고취하되, 결코 그들이 문제의 일부라고 비난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 모두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

이런 이상한 논리는 엘리트를 위해 복무하는 ‘지식소매상’들에 의해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이들은 사회문제를 말하면서도 맥락을 제거하고 분해해, 전체를 조망하기를 거부한다. 테드(Ted) 강연에 나와 그럴듯한 지혜를 알려주는 지식소매상들은 “사람들이 겁먹지 않도록 사회문제를 한입 크기로 잘라 소화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며, 시스템의 변화보다 ‘희망에 찬 해결책’을 강조한다”. 저자는 니얼 퍼거슨, 파라그 카나, 토머스 프리드먼같이 승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의 특징을 상세히 제시한다.

“가장 개인적인 일이 가장 정치적인 일”이라는 이전 세대의 구호는 “가장 정치적인 일이 가장 개인적인 일”로 뒤집혔다. 지식소매상들은 구조적인 성차별을 비판하기보다, 여성들에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두 다리를 벌리고 서는 ‘원더우먼 자세’를 취해서 당당하게 보이는 법을 알려준다. 해고당한 이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노동시장의 구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취약성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지식소매상들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사회정의’란 용어 대신, 엘리트가 좋아하는 ‘공정성’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불의에 직면했을 때 가해자에 대해 생각하면 분노와 공격성이 커지지만, 피해자에게 시선을 돌리면 분노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엘리트의 철학에 따라, 가해자가 아닌 희생자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만든다.

이 모든 타협들이 누적되면 어떻게 될까. “사적이고, 탈정치적인 데다, 현 시스템을 조금도 파괴하지 않는 변화”들만 일어난다. 진정한 비판은 점점 더 외면받고, 양지에서 손쉽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포장용 아이디어가 뜨면서, “표면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놀라운 결과가 발생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모두가 승자이며 희생은 필요하지 않다는 마켓월드의 거대한 이야기더미에 올라탄다.

불평등 시대에 “원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엘리트”는 오히려 우리의 ‘구원자’로 변신했고, 그래서 갈수록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의 현실은 가해자 없는 비극이 되어가고 있다. 가해자가 지워진 비극은 더욱 비극적이다. 마치 영화 <기생충>이 이렇다 할 악역 없이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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