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IS를 향한 내 유일한 무기는 증언뿐”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16. 21:19

본문

ㆍ더 라스트 걸
ㆍ나디아 무라드·제나 크라제스키 지음·공경희 옮김
392쪽 | 북트리거 | 1만7800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 여성 나디아 무라드의 생생한 자서전

IS의 집단학살 만행 때 성노예로 끌려갔다 온갖 고난 겪고 탈출

숨기고 싶은 상처에도 테러범들을 법정에 세우겠다는 각오로

전쟁과 폭력에 유린당한 여성들을 대변, 인권운동가로 거듭나

비극을 방관하고 이용하려 했던 ‘침묵의 동조자들’에게도 일침


나디아 무라드는 이슬람국가(IS)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수천명의 야지디 여성 중 한 명이다. 그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후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물건처럼 이리저리 사고팔리며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담요 위로 채찍질 당했던 순간에 대해 말해야 했다. 말을 할 때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공포에 휩싸이지만, 그는 수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한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더 라스트 걸>이란 자서전을 통해 다시 한번 고통의 경험을 생생히 복기한다. 그것만이 테러범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 ‘생존자’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이 무기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의 비극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이용하려 했던 ‘침묵의 동조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이라크 북부의 작은 야지디 마을 ‘코초’에서 가족들과 함께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던 나디아는 21세였던 2014 IS 포로로 끌려가던 버스 안에서 ‘사비야’라는 낯선 말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듣게 된다. 그는 방금 전 오빠 여섯 명이 마을 남성들과 함께 집단총살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 참이다. 다른 야지디 마을 사람들은 IS의 공격을 피해 신자르 산속으로 도망갔다가 정상에서 수천명이 고립됐다. 40여명에 이르는 어린이가 굶주림과 탈수로 죽었고, 산에서 탈출하려다 IS에 의해 죽은 수는 훨씬 더 많았다.

IS 무장병은 버스 안에서 저항하는 나디아에게 총을 겨눈 채 “너희들은 ‘사비야’가 되려고 여기 왔다. 너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비명을 지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IS는 성노예로 사고파는 젊은 여성, 즉 ‘인간 전리품’을 사비야라고 불렀다. 버스 안의 여성들은 IS 신병 조직원을 유인하는 데 쓰이거나 충성과 선행의 보상으로 주어질 터였다. 그들은 이제 인간이 아니었다. 성노예인 ‘사비야’들이었다.

성노예는 전 세계 무슬림 공동체가 오래전에 금지한 일이다. 그럼에도 IS가 신자르를 공격하고 여자들을 성노예로 삼은 것은 일부 탐욕스러운 군인들이 자의적으로 저지른 범죄가 아니다. 이는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뤄진 집단학살이었다. IS는 <포로와 노예 포획에 대한 질문과 응답>이란 소책자를 배포해서 노예를 강간하는 것은 죄가 아니며, 사춘기 이전의 노예와도 성교가 가능하다는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다.

IS는 야지디가 경전이 없는 종교를 믿는 ‘쿠파르’(불신자)인 데다 악마 숭배자이고 태양을 향해 기도하는 이교도이므로 죽이거나 노예로 삼아 마땅하다는 논리를 세웠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거짓으로 포장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IS가 야지디 집단학살에 나선 이유는 야지디가 이라크 내에서도 가장 힘없고 약한, 그래서 마음 놓고 유린할 수 있는 소수민족 중 하나였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나디아 무라드가&nbsp;2016년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은 후 대중들 앞에서 이슬람국가(IS)의 성노예로 잡혀갔던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nbsp;AFP연합뉴스


야지디의 역사는 언제나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 자치정부 모두에 전략적 요충지인 신자르 지역은 풍부한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쿠르드는 이 땅이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에 속한다고 주장했고, 이라크 정부는 야지디에게 아랍족이 되라고 강요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야지디는 미국의 편에 섰다. 소수민족 탄압 정책을 펼치던 사담 후세인과 달리 미국은 야지디에게 친절했다. 미국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 수니파가 신자르 지역에서 실각하자, 그 자리는 쿠르드족의 차지가 됐다. 하지만 코초가 IS에 포위당했을 때 쿠르드군인 페시메르가는 야지디인에게 아무런 경고조차 하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탈출해버렸고, 미국은 야지디인이 그토록 애원했던 비행기를 보내주지 않았다.

‘사비야’가 된 나디아는 IS 센터 건물 안에 마련된 노예시장의 상품이 된다. 여자들이 갇혀 있는 방에 들어온 ‘구매자’는 몇 분 만에 세 명의 여성을 고른 다음 미화 한다발을 무장병에게 건네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세 소녀가 끌려 나갔다. 나디아 역시 하지 살만이라는 IS 고위직의 노예로 팔려간다.

살만은 탈출을 시도하다 적발된 나디아를 채찍질 한 후 징벌로 경비병 2명에게 집단강간을 허용한다. 나디아는 경비병이 자신을 강간하기 전 조심스레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자신의 안경은 그렇게 소중히 다루면서도 사람인 나에게는 얼마나 가혹했던지.” 그 후 나디아는 니네베 북부 지역인 함다니야의 검문소 경비병들의 ‘사비야’가 됐다가 또 다른 IS 대원의 사비야가 되는 등 ‘트럭에 실린 밀가루 부대’처럼 이리저리 팔려다니는 신세가 된다.

나디아의 탈출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의 새 ‘주인’이 깜빡하고 문을 잠그지 않는 바람에 집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나디아는 무작정 한 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만약 그 집에 IS 동조자가 살고 있다면 그는 다시 끌려가 더욱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터였다. 그러나 문을 열어준 사람은 다행히 선량한 수니파 무슬림인 나세르였고, 그는 위험을 무릅쓴 채 나디아의 남편 행세를 하며 그를 데리고 IS 점령지역이 아닌 안전한 에르빌까지 동행해준다.

나디아는 일단 IS 지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후 벌어진 일은 세상이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으로 선명히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에르빌로 가는 검문소에서 쿠르드군은 나디아가 포로로 잡혀갔다 탈출한 야지디인임을 알게 되자, 나세르와 나디아의 진술을 비디오 영상으로 찍은 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방송국에 넘긴다. 신분이 노출되면서 나디아를 도운 나세르와 그의 가족들은 IS에게 보복당할 위험에 처하고, 나디아 역시 왜 얼굴을 공개했느냐는 가족들의 원망을 산다. 나디아는 이때 “개인의 비극으로 여겼던 내 사연이 남들의 정치적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2015 년 &nbsp; IS 의 공격을 피해 신자르 산속에 마련된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는 야지디 여성들. &nbsp; AFP 연합뉴스


나디아는 이 책에서 야지디 여성들이 IS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할 때 이를 보고도 모른 척 눈 감은 ‘침묵의 동조자’들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노예시장에서 여성들이 지르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사는 거리에까지 퍼져 나갔지만 누구도 이들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 나디아처럼 성노예로 끌려간 그의 사촌은 탈출한 후 도움을 청한 주민들에게 여섯 번이나 신고를 당했고 매번 다시 끌려가 처벌을 받았다. 나디아를 구해준 나세르 가족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모술이 IS로부터 해방된 후 그곳 주민들은 변명했다. “테러범들 때문에 우리도 힘들었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노라고. 나디아는 “그들에게 연민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난 그들에게 선택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디아는 우여곡절 끝에 야지디 난민캠프에서 가족들과 재회한 후에도 자신이 성노예였다는 사실만큼은 한동안 숨기려 했다. 살만이 자신을 성폭행할 때마다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탈출해서 네가 집에 간다 해도 네 가족들이 널 죽일 거야. 이제 넌 처녀도 아니고 무슬림이니까.” 보수적인 야지디 공동체에서 결혼 전에 처녀성을 잃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다. 다행히 야지디 종교 지도자들은 처녀성을 잃고 강제 개종당한 여성들이 공동체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몸을 망친’ 여인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전 보도된 외신에 따르면, 야지디 종교 지도자들은 최근 “야지디 여성들이 성노예로 끌려가 무슬림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까지 야지디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소수종교를 믿는 소수민족들은 전쟁과 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이지만, 가장 밑바닥의 고통은 언제나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몫이다.

나디아는 “때로 집단학살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오직 야지디 여성이 당한 성 학대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가 저항한 경험담을 듣고 싶어 한다”며 “하지만 나는 강간뿐 아니라 내 오빠들이 살해당한 일, IS에 끌려간 어린 조카가 세뇌를 당해 IS 대원이 된 것까지 모두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디아가 이 책에서 담담히 서술해 내려간 것을 읽다 보면 그의 목소리는 인권을 유린당한 모든 여성의 목소리이며, 모든 난민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영리 구호단체 ‘야즈다’와 함께 집단학살과 인신매매 생존자들을 돕는 프로그램인 ‘나디아 이니셔티브’를 설립하는 등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그는 2016년 유엔 최초의 ‘인신매매 생존자 존엄성을 위한 친선대사’로 임명됐다. 지난해에는 99번째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나디아는 “IS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목록에 성학대가 포함돼야 하며, 야지디 같은 고대 소수종교를 보전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테러범들을 법정에 세울 때까지 나는 나의 무기(성노예 경험의 증언)를 계속 사용할 것”이라며 “나는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사연을 가진 마지막 여자(더 라스트 걸)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