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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말’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 세계의 모형’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16.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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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ㆍ사사키 겐이치 지음·송태욱 옮김
ㆍ뮤진트리|404쪽|1만8000



국어사전은 어느 집에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어사전을 잘 모른다. “가까이에 있지만 어딘가 냉랭한 관계”다. 그럴 만도 하다. 국어사전은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만 찾아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전이 다 거기서 거기지’ ‘올바른 의미가 쓰여 있는 게 사전인데, 사전에 차이가 있을 리 없잖아’.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국어사전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다. NHK 디렉터인 저자는 일본어 관련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취재차 만난 사전 편찬자에게서 1970~1980년대 일본 사전계의 양대 거성이었던 야마다 다다오와 겐보 히데토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도쿄대 동기생인 겐보와 야마다는 원래 힘을 합쳐 <메이카이 국어사전>을 만들어낸 좋은 친구사이였다. 하지만 어떤 시점을 계기로 둘은 결별했다. 이후 같은 출판사에서 성격이 완전히 다른 국어사전 두 권을 탄생시킨다. 야마다의 <신메이카이 국어사전>과 겐보의 <산세이도 국어사전>이 그것이다. 둘을 갈라서게 만든 근본 원인은 사전에 대한 신념의 차이였다.

겐보에게 평생 변하지 않은 신념은 ‘사전은 말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쓰이는 무수한 말들을 최대한 현실 그대로 비추기 위해 단어의 용례를 하나하나 모아 한 장 한 장의 카드에 기록했다. 주간지를 읽을 때도 기사가 나오는 페이지만이 아니라, 표지 뒷장의 담배 광고에 나오는 ‘담배는 스무살부터…’라는 작은 글씨까지 단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일본어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고 같은 속도로 달리기 위해서였다.

촌각이 아까웠던 그는 절대 자동차를 타지 않고 전철과 기차만 고집했다. 흔들리는 자동차 안에서는 글자를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어 수집에 몰두하며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렇게 만든 용례 카드는 145만개에 달한다.

야마다 다다오가 만든 &lt;신메이카이 국어사전&gt;(왼쪽)과 겐보 히데토시가 만든 &lt;산세이도 국어사전&gt;. 두 국어사전은 누적합계 발행부수가&nbsp;4000만부에 달한다.&nbsp;NHK&nbsp;다큐멘터리 캡처


겐보는 사전편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란 말이나 표현이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지만, 단 한번도 ‘그건 틀렸다’고 대답한 적이 없다고 한다. 말은 ‘흐트러짐’이 아니라 ‘변화’이기 때문에 개인의 식견을 기준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청년들의 은어에 불과한 ‘ABC’를 과감하게 사전에 넣은 것도 이런 신념과 무관치 않다.

에이(A) 키스. [이하 B(=애무), C(=성교)로 이어진다]

“현실적으로 ABC는 전국 어디에나 알려진 학생들의 공통 용어입니다. 이 말을 사전에 싣지 않음으로써 이런 말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싣지 않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만 모르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적극적으로 실음으로써 세대를 이어주는 새로운 기능을 사전에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야마다는 단어 수집과 선정에만 몰두하는 겐보를 답답해했다. 그에게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은 ‘사전은 문명비평’이란 것이었다. 그는 편리한 의사소통 도구로 여겨지는 ‘말’이 사실은 부자유스러운 전달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말에는 표면적인 의미와 동시에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면의 의미를 숨기지 않고 분명히 밝히는 것이 부자유스러운 전달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진 우리 인간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의 이러한 신념은 <신메이카이 사전>에 실린 단어의 뜻풀이를 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이런 식이다.

동물원 생태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한편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잡아온 많은 조수·어충 등에게 좁은 공간에서 생활할 것을 강요하며 죽을 때까지 기르는 인간 중심의 시설.

숙사 공무원 등에게 부당하게 싼 집세로 제공하는 주택.

공약 정부·정당 등 공적인 위치에 있는 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일. 또한 그 약속 [금방 깨지는 것에 비유된다]

그의 사전은 극과 극의 평을 받았다. 한쪽에서는 ‘핵심을 찔렀다’며 호평을 내놓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오만하고, 학문을 사유화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야마다는 자신의 사전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모두가 칭찬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일입니다. 나쁜 점이 있으면 언제든 고치면 됩니다.”

저자는 사전을 취재하면서 “국어사전의 종류가 왜 그렇게 많은 거죠? 한 권으로 정리하면 될 텐데 말이에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실제 민간 출판사가 독자적인 편집 방침으로 엮은 사전이 난립하면 하나의 ‘단어’ 의미가 사전에 따라 달라지는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말은 맞고 틀림이 아니라 변화해 가는 것’이라고 했던 겐보처럼, 저자는 “소리도 없이 변하는 ‘말’을 절대적으로 정해진 의미로 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국어사전이 틀리지 않는 ‘신’이나 ‘전능한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사전은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한 사전의 ‘개성’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겐보의 후계자인 현 <산세이도 국어사전> 편집자에게 ‘사전이란 대체 뭘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전은 모르는 말을 알기 위한 실용품이지만,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사전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작은 ‘모형’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주를 ‘말’을 통해 인식합니다. 세계를 ‘말’로 미니어처화해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말’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 세계의 모형. 그것이 사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사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양한 세계관으로 포착한, 손바닥에서 무한하게 펼쳐지는 우주’. 그것이 국어사전이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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