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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하는 인문독서공동체, 세상 바꾸는 주춧돌 되길”

by 정소군 2022. 3. 1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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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수원서 작은도서관 ‘책고집’ 운영하는 최준영 작가
ㆍ매회 ‘만석’인 인문학 강의, 지적 허기 채워줄 책 모임도
ㆍ“혁명적 사건 뒤 ‘교양 혁명’…책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죠”

사비를 털어 경기 수원에 작은도서관 ‘책고집’을 만든 최준영 작가가 지난달   29 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 @ kyunghyang.com


신형철 문학평론가, 엄기호 사회학자,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여울 작가, 서민 교수, 은유 작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저자이거나 전문가인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통점은 ‘책고집’이다. 이들은 모두 지난해 12월 경기 수원에 둥지를 튼 작은도서관 ‘책고집’에서 인문학 강의를 했다.

이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서울은 물론 부산, 강원, 충청 지역의 사람들까지 책고집을 찾았다. 신형철 평론가와 정혜신 전문의가 강의한 날에는 공간이 부족해 신청이 마감됐는데도, 무작정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서서 듣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의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지방에서도 올라온다고 자랑하려는 건 아니고요, 이런 인문학 강좌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 지방에도 많은데 사회가 그들의 갈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전국에 작은도서관이 6500여개라고 하지만 인문학 강의를 열 예산도 없고, 좋은 강사들이 먼 지역까지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지난달 29일 책고집에서 만난 최준영 작가(53)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매달 임차료와 운영비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곳은 최 작가가 개인 소장하고 있던 책 3000여권과 사비를 털어 만든 공간이다. 강연료도 다른 기관의 10%밖에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대중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강연자까지 그의 부탁에 흔쾌히 응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 덕분일 것이다.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 중 하나는 ‘거리의 인문학자’이다. 노숙인, 미혼모, 기초생활수급자 등 가난하고 힘든 소외계층을 상대로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얻은 별칭이다. 최 작가는 “내가 쓴 책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결핍을 즐겨라>인데, 사실 나 역시 결핍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녔다. 주경야독 끝에 검정고시로 대학에 갔지만, 결국 제적을 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이 없는 것은 커다란 결핍이었다. 독학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인문학 공부를 했지만 학위도 없는 사람이 강의한다고 비아냥대는 시선이 있을까 봐, 2시간 강의를 위해 며칠 동안 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었다.

&lsquo;책고집&rsquo; 입구에 걸려 있는 표지판.


“그렇게 고집스럽게 책을 읽으며 버텼습니다. 책을 읽고 인문학 공부를 한 노숙인이 술 마시고 노름하던 삶을 청산하고 자전거 수리공으로 취업하는 걸 보면서 제 얘기 같아 많이 울었어요. 결국 책이 그분도, 저도 살린 거죠.”

그는 우리 사회를 살릴 힘도 고집스러운 독서와 인문학에 있다고 본다. 20세기의 시민운동이 이데올로기 중심이었다면, 21세기의 시민은 개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공부하러 모인다. 예전과 달리 시민단체들이 총회의 정원도 채우기 어려운 실정인 반면, 2만원의 회비를 받는데도 책고집의 인문학 강좌가 매번 꽉꽉 차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최 작가는 “책 모임은 정치색을 띠고 있지 않지만, 세상을 바꾸는 주춧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어떤 의도를 갖고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텍스트 속에서 알게 된 지식을 통해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밑에서부터 변화의 추동성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책고집을 누구에게나 열린,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공간으로 운영하려 한다. 수원지역 시민단체를 위해 무료 대관도 해주고, 이 단체들과 연계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최근에는 수원 매향여고 교사들이 학생들 동아리 활동 공간으로 활용해도 되겠냐고 문의해 와 반갑게 수락했다.

앞으로 그의 목표는 책고집을 1년 365일 강의가 열리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최 작가에 따르면, ‘인문학의 도시’ ‘책의 도시’를 표방하는 지자체가 100군데가 넘지만 지자체들이 여는 무료 인문학 강의의 대부분은 <알쓸신잡>이나 <어쩌다 어른> 같은 TV 프로에 출연한 유명인 위주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그런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함께 토론하면서 서로의 지적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인문 독서 공동체이다.

“모든 혁명적 사건 뒤에는 반드시 ‘교양의 혁명’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흔히 배고픈 민중이 우연한 계기로 봉기해 혁명을 일으킨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고, 그것이 외화된 것이 혁명이라고요. 영화 <변호인>에서처럼 부마항쟁도 사실 책모임에서부터 시작된 거잖아요. 전 우리 책고집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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