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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5년...멈춰있는 것은 우리 사회였다 [책과 삶]

by 정소군 2022. 3. 1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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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 지음

창비|392쪽|1만6000


‘그 날’ 이후 멈춰버린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의 시간을 우리 사회가 다시 흐르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뭔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그들의 시간은 멈춰있지 않았다. 고통 속에 움츠러 있던 이들은,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차라리 껴안은 채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금씩 껍질을 뚫고 나왔다. 정작 지난 5년 동안 멈춰있는 것은 우리 사회였다.

이 책은 <금요일엔 돌아오렴>(2015), <다시 봄이 올 거예요>(2016)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학생의 육성을 기록하고 전달해 온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의 세번째 책이다.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53명의 세월호 유가족과 4명의 생존자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한 사람이 듣는다면 잠도 안 자고 꼬박 엿새는 들어야 할 방대한 양이다.

저자 중 한명인 박희정 인권기록활동가는 “‘싸우는 유가족’들에게서 우리가 분명히 봐야 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이 펼치는 싸움의 빛깔”이라고 말한다. “그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정의와 싸우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너와 같은 모두를 살리는 마음으로 넓히기로” 마음 먹었다.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돼 있다. 부서진 일상의 결을 따라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그들의 상실감을 하나씩 더듬어 살피고, 참사 이후 지금까지 유가족들에게 자행된 사회적 부정의를 증언한다. 그 ‘부정의’는 박근혜만이 아니라 때로, 아니 사실은 종종,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이 이들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족과 이웃이 떠난 빈 공간을 채워줄 ‘416 가족’을 탄생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와 마주한다.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이 지난 5년 동안 경험한 고통과 변화의 과정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이 책에 담긴 인터뷰 내용을 주제별로 재구성해 가능한 그대로 발췌해 옮긴다.



부서진 일상

‘우리 혁이 흔적 하나라도 찾고 싶다…’ 혁이 장례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서 방에 누워만 지냈을 때 빨지 못한 후드티가 딱 떠올랐어요. ‘거기에 혹시 머리카락이 남아 있지 않을까?’ 벌떡 일어나 창문에 펼쳐놓고 머리카락을 찾았어요. 여덟개를 찾았어요. 코팅해서 장롱에 보관하고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되니까요. 지금도 한번씩 혁이 머리카락을 만져요. 가끔 한번씩 꺼내서 만질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어요.(울음) -조순애(강혁 엄마)

처음 3, 4년은 남편이 꼴도 보기 싫었어요. “딸 잃고 너는 그게 입으로 들어가냐?” 아들이 뭘 먹으러 가자고 해도 혼냈어요. “너는 그게 입으로 들어가?” 그래놓고도 너무 배가 고프니까 나도 모르게 밥통을 끌어안고 먹다가 배가 좀 차면 막 울어요… 맨날 은정이 생각하면서 술먹고 울고불고 남편과 싸우니까 하루는 아들이 그러는 거예요. “엄마, 나 좀 봐줘… 나도 엄마 아들이잖아.” -박정화(조은정 엄마)

나는 농담하고 장난치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사고 후에는 그걸 못하겠더라고요. ‘자식잃은 사람 맞아?’ 그런 소리 할 것 같아서. 대인 관계가 다 끊긴 것 같아요. 그런데 괜찮아요. ‘내일 모레 죽을 건데 뭐’ 마음이 그렇거든요. 2014년에 겨울옷을 다 버렸어요. 겨울까지 살아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살게 되더라고요. -한재창(한세영 아빠)

2018년 2월에 제훈이 동생이 졸업을 했어요. 둘째한테는 너무 기쁜 날인데 제훈이 생각이 안날수가 없더라고요.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두번째 졸업식이었을 텐데. 하나를 건너뛰고 둘째 졸업식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어요. ‘아…결혼식도 이렇겠구나. 손주가 생겨도 이렇겠구나’ (침묵) -이지연(김제훈 엄마)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한달 후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설치된 유실물 관리소에 보관된 신발. /경향신문 자료사진



참사 이후의 참사, ‘사회적 부정의’

1주기 때 광화문 집회에서 경찰이 내 머리카락을 확 잡더니 자기들 장갑에 캡사이신을 뿌려서 내 눈에 비볐어요. 범죄자 체포하듯이 양쪽에서 끌어내면서 무릎을 팍 치는 거예요. 얼굴을 시멘트 바닥에 박았어요. 경찰 버스에서 전경이 막말을 하기에 제가 그랬죠. “넌 집에 가면 엄마 없냐?” 없대요. 그러고 욕을 하는 거예요. ‘아 이게 대한민국이구나. 진상규명이 돼도 나는 이 나라에서 못 살겠구나…’ -이지성(김도언 엄마)

친구들이 세월호가 세금을 얼마 빼먹느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는 생존자 가족이니까 상처 안 받을 줄 알고 하는 거지. 내가 술병으로 자해를 했어요. 화를 못 이겨서. 울컥해서 때릴 수도 없고. 때리면 또 이슈가 되잖아요.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렇게 쉽게 이야기들 안했으면 좋겠어요. 희생자 가족들은 얼마나 상처가 크겠어요. -김성한(생존학생 김소진 아빠)

생명안전공원 때문에 우리 동네에 현수막이 걸렸어요. “납골당 반대!” 우리 애가 그걸 볼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우리 아파트에 비방 현수막이 붙을 까봐 제가 막 생각했어요. 우리 라인부터 집집마다 방문해서 얘기를 해야 하나? 사실은 우리 아이가 세월호 생존자에요, 생명안전공원 짓는 것에는 반대하더라도 현수막 붙이는 것만큼은 안하시면 안돼요?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 -문석연(생존학생 이시원 엄마)

2014년 대통령 만나겠다고 청와대 가려는데 전경이 “어머니, 저도 준영이에요”하는 거예요. 제가 가슴에다 오준영, 우리 아들 명찰을 달고 갔는데 자기도 김준영이라고 울먹이면서 얘기하는 거예요. 저도 스무살인데 이러시면 저도 다치고, 어머니도 다친다고, 제발 물러서시라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처럼 울먹울먹하면서 “다쳐요, 다쳐요” 했던 눈망울이 선해요. 그 말이 우리 준영이가 ‘엄마 다쳐요. 거기까지 가지 마세요’ 하는 것 같은 거예요. -임영애(오준영 엄마)



경향신문 자료사진

416 가족의 탄생

나는 상황 자체가 다르잖아요. 분명히 피해자인데, 피해자도 아닌 것이. 그런데 유가족들이 오히려 먼저 우리 아이 안부를 물어요. 추운 곳에 있지만 서로 부둥켜 안고 있으면 체온이 유지되는 것처럼. 건우 엄마랑 기억교실 갔을 때 건우 자리에 가서 처음으로 글을 썼어요. “건우야 고마워” 네 덕분에 너무 좋은 네 엄마 아빠를 만났다는 얘기까지는 솔직하게 못 쓰겠더라고요. 그게 잃음으로 인해서 얻어진 거잖아요. 이렇게만 썼어요. “너는 알지?” -문석연(생존학생 이시원 엄마)

아픈 사람들끼리 연대하는게 더 힘들어요. 위로도 안돼요. 왜냐면 내가 힘들다고 하면 ‘언니 나도 힘들어’ 하니까. 그런데 내가 다른 부모 욕할 때 아이가 너무 아팠을 것 같은 거예요. 우리 엄마한테 그러지 말라고, 우리 엄마 지금 아프니까 시간을 달라고 했을 거 같아요. 그래서 분향소 가서 아이들 앞에 서서, 누구야 미안해, 누구야 미안해, 그랬어요. -임영애(오준영 엄마)

지금 제 주변을 채운건 제가 가족이라고 표현한 우리 유가족들. 카톡에 연결된 분들이 싹 바뀌었어요. 전에 알던 분들은 한 분도 안 남아 있어요. 위로한다고 한마디 하는게 상처를 주고, 상처받기 싫으니까 나 스스로 미리 차단하고. 유가족들은 달라요.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고. 내가 아팠던 거 똑같이 겪은 사람들이니까 이해할 수 있고. 진짜 가족처럼, 혈연처럼 느껴져요. -윤옥희(김웅기 엄마)

유가족 엄마를 만나고 있으면 그 순간만은 위로가 돼요. 다시 집에 가면 힘들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저 엄마도 나만큼 힘들겠지?’하면서 힘든 모습 안 보이려고 서로 노력해요. 그러니까 눈에서 눈물이 나는데도 입은 웃는거야. -조순애(강혁 엄마)



김상민 화백

다시 만난 세계

처음 밖에 나갔을 때는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기조차 밉더라고요. 세상 사람들이 다 가해자 같았어요. 아니, 사실은… 부러웠어요. 옆집에서 나는 라면 냄새도 부러웠어요. 우리 집은 개미 한마리 없는 것처럼 썰렁한 것이 너무 슬프고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나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게요… 나보다 힘든 사람도 보이기 시작하고… 내 마음이 여기까지 왔구나… -유희순(김호연 엄마)

2015년 1월에 세월호 가족들이 도보행진을 할 때였어요. 세월호 엄마가 목도리를 안하고 온거예요. 그런데 어떤 엄마가 아기 목도리를 풀어가지고 줬어요. 그 엄마한테 되게 소중한 아기잖아요. 나를 되돌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일을 당했나, 나 혼자 살자고 아등바등해서. 내가 잘못해서 내 죄를 내 새끼가 받고 갔나. 거기서 무너져서 울었어요. 시민들의 그런 마음… 그분들이 없었으면 우리는 못 싸웠을 거예요. -임영애(오준영 엄마)

사망신고 하러 가면서 애 아빠랑 생각한게, 제훈이가 하늘로 갔지만 아이 키우는 비용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자. 그래서 혼자 있는 아이, 할머니가 돌보고 있는 아이 몇명에게 지원하는 걸 신청했어요. 그러던게 계속 늘어나서 이제는 얼마가 나가는 지도 모르게 됐어요. 참사를 겪으면서 내 위주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자, 인생의 방향전환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조금… 조심스러워요. 저희는 보상 받으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한테는 416 세월호 가족이라는 인장이 있잖아요. -이지연(김제훈 엄마)

“오늘 세월호 회의 있는데 안 오세요?” “아 죄송해요. 다른 사안이 터져서…” “지금 세월호가 부업이에요?” 나는 오로지 세월호인데 이 사람들은 이 회의가 우습나? 막 화를 냈어요. 저는 이 사람들이 우리만 도와주는 사람들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보니까 자기네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와서 우리를 도와줬던 거예요. ‘우리 딸이, 우리 애들이 제일 불쌍해. 이것보다 더 아픈 건 없어’ 사실 제가 그런 생각에 빠져있었거든요. ‘아, 저런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세상이 이 정도였구나. 다른 많은 아픔이 있구나’ 밀양도 갔다오고 강정도 가고 용산 참사 어머님들도 만나면서 깨달은 거죠. -윤경희(김시연 엄마)


경향신문 자료사진
 

5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지금

수학여행 가기 전에 준영이가 입었던 야구복을 4년 동안 안 빨았어요. 그런데 4년이 넘으니까 때 묻은 곳이 부패되더라고요. 아이의 체취가 남은 마지막 옷이라도 남겨두고 싶었지만 엄마인 저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힘이란게 있구나… 지금 국민들이 잊지 않겠다, 행동하겠다, 함께해 주시지만 그분들도 언젠가는… 영원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임영애(오준영 엄마)

우리가 진상규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유가족이 원하는 진상규명이 따로 있는 줄 알아요. 우리는 그냥 진실을 알고 싶은 것 뿐이에요. 박근혜의 사생활을 알고 싶은게 아니거든요.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왜 구하지 않았고, 왜 해경들 중에는 배에 들어간 놈이 한명도 없는지. -장훈(장준형 아빠)

오히려 지금이 더 힘들어요. 정권이 바뀌니 국민들의 관심도 줄어들고 마치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처럼 수수방관하는 분위기로 바뀐 것 같아요. 사건의 실마리를 쥔 공무원들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증거자료 요구했을 때 깡그리 무시했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예전에 연대했던 그 많은 국민들을 어떻게 다시 끌어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함께 할까? 이게 숙제죠. -임종호(임세희 아빠)

그래도 나는 조급하게 생각 안해. 너무 지치고 힘들고 실망스럽지만 4년 안에 이 정도 이뤘으면 성공한거야. 난, 사람 자체가 세월호야. 긴 세월이니 오늘 또 살아내야지. -박혜영(최윤민 엄마)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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