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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노동의 대가와 최저임금

칼럼

by 정소군 2015. 3. 20.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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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대가에 최소한의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먼저 주장한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진 자’들이었다. 14세기 유럽 전체를 휩쓴 흑사병으로 영국 인구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일꾼과 농부로 부릴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해지자 임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콧대가 높아진’ 평민들은 예전보다 돈을 3배 이상 더 달라고 요구했다.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 왕에게 임금의 ‘상한선’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351년 ‘노동자 법령’이다.

 

이 법은 국왕이 정한 최대 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할 경우 벌금을 물리도록 했다. 법을 지탱할 논리가 필요해졌다. 그들은 중세 신학교리를 접목해 이렇게 설파했다. “부는 삶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보다 더 적어도 안되고, 그보다 더 많으면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임금 상한선만 있어선 곤란했다. 1389년 법령의 일부가 개정됐다. 식량 물가에 맞춰 임금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최저임금제의 시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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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과정 자체는 상당히 기득권층의 자기편의적인 요소가 많지만, 사실 그들이 내세웠던 논리가 지금처럼 와닿는 때도 없다. 한 쪽에서는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울 만큼 너무 많은 보너스를 챙기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삶의 조건’을 충족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달 초 미국 정책연구소(IPS)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월가 금융가 종사자 16만여명이 받은 보너스 총액은 285억달러(약 31조9200억원)였다. 이는 미국에서 연방정부가 정한 최저임금(시간당 7.25달러)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모두의 연봉 총액을 합친 것보다 많고, 패스트푸드점 노동자 220만명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인상시켜 주고도 남을 액수다.

 

반면 최저임금 생활자들의 삶은 어떨까. 영국은 지난 17일 올해 최저임금을 지난해보다 3% 인상된 6.70파운드(약 1만1140원)로 결정했다. 정부는 물가를 감안한 실질 인상률로 따지면 2008년 이후 가장 큰 폭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BBC방송 등은 “먹지도 않고, 전기도 안 쓰고, 옷도 안사고, 세금도 안내고, 몽땅 저축해도 런던에서 침대 1개짜리 볼품없는 방 월세를 겨우 낼 수 있는 정도”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상황도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이 없다. 최저임금 5580원은 유명 커피 체인점에서 파는 커피 한 잔 값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14세기에도 “임금은 삶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공감대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임금을 올리면 그나마 지금 가진 일자리도 뺏기게 될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만 돌아온다.

 

일각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이 “자영업자와 알바생들 사이에 ‘을과 을’의 싸움을 부추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째서 ‘을과 을’의 싸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의 삶의 조건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결국 그것은 사회 모두가 책임져야 할 문제로 돌아온다. 단기적으로 종업원을 고용한 자영업자들의 부담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골목상권 보호와 적정 하도급 단가 보장 등 경제민주화 정책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자영업자의 가족들이 저임금 노동자인 경우도 많다.

 

최저임금 제도의 목표는 ‘일자리 늘리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바나나나 버터가 아니다.” 노동의 대가를 상품 가격을 매기듯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결정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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