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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전염병과 민주주의

칼럼

by 정소군 2015. 6. 1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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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결과들은 민주국가일수록 국민들이 더 건강하다고 말한다. 2004년 영국 메디컬 저널에 실린 논문 ‘건강에 미치는 민주주의의 효과’는 그중 하나다. 이 논문은 경제·소득수준 등 다른 모든 변수를 통제한 후,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하는 170개국의 ‘자유지표’와 건강지표의 상관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건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염병도 마찬가지다. 미 브라운대 의학교수인 케네스 메이어는 자신의 저서 <전염병의 사회생태학>에서 “전염병의 확산은 바이러스의 속성뿐만 아니라, 그 나라 정부와 정치·사회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전염병 확산 방지에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이들이 설명하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가 재집권을 하려면 표를 의식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와 반응을 살피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 사태 수습을 위해 전면에 나선 것을 두고 대권을 노린 행보라며 깎아내렸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왜 민주주의가 전염병 차단에 강점을 지닐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그러나 정작 박근혜 정부가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행태는 민주국가의 모든 속성을 부정했다. 국민들의 공포에 기민하게 반응하긴 했으나 그래서 나온 대응은 유언비어 처벌이었다. 공무원들은 재빨랐지만, 청와대와 국회 앞에 열감지기를 설치하고 문형표 복지부 장관이 탈 엘리베이터 의전을 챙기는 데만 날렵했다. 메르스 사태에 오랜 침묵을 지켰던 박근혜 대통령이 그나마 표를 의식한 듯 보인 유일한 행동은 박원순 시장을 비판하며 견제에 나설 때뿐이었다. 혹시 이 정부가 아예 재집권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닐까란 의구심마저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더 이상 표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코노미스트 전 한국 특파원인 다니엘 튜더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미 한국은 일당체제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야권이 정치적 경쟁력을 잃으면서 정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권위주의 국가로 말이다.
 
그런데 뭔가 여전히 석연찮다. 일부 학자들은 민주 정부보다 권위주의 정부가 때로 전염병 확산 방지에 더 효율적이라며 상반된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뉴욕주립대(뉴팔츠)의 조나단 슈와츠 교수는 2003년 사스가 확산됐을 당시 중국과 대만 정부의 대응을 비교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초반에 사스 발생 사실을 은폐해 사태를 악화시켰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대만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역에 성공했다. 모든 권한이 집중된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가동해 병원과 대중을 통제한 덕분이다. 그가 인터뷰한 중국의 의사들은 처음에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에 불만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사스를 진압하는 데 핵심 열쇠였음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슈와츠 교수는 이러한 효율성이 중국의 강력한 일당체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런데 민주 정부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든 이 정부는 심지어 권위주의 정부의 몇 안되는 장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인한 결단력을 자랑하면서도, 병원과 기업을 통제할 힘은 없다. ‘제2의 메르스 기지’가 된 삼성서울병원은 애초부터 정부의 통제대상에서 제외돼 ‘치외법권’이냐는 말까지 나온다.
 
도대체 이 정부의 정체는 뭔가. 민주국가의 정부라고 보기엔 너무 비민주적이다. 권위주의 정부라고 말하기엔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다. 답은 뻔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오직 정부만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바로 그 사실. 이 정부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무능한 정부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을 ‘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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