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어긋난 역사의 부산품, 테러의 역사

국제뉴스

by 정소군 2014. 9. 26. 23:53

본문

2001년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9·11 테러 이후 13년이 흘렀다. 알카에다만 없애면 평화로워질 줄 알았던 세계는 알카에다보다 더 잔혹한 이슬람국가(IS)라는 또 다른 테러조직의 등장으로 더 큰 공포에 떨고 있다. 


악명 높은 한두 개의 테러단체를 도려낸다고 해서 테러를 근절하거나 척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현대적 형태의 테러 조직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생겨나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일까. 

어두운 고비 때마다 급성장… 반세기의 ‘악몽’


미 국방부의 정치군사 분석가였던 존 무어가 미 공영방송 PBS에서 분석한 테러리즘의 진화 단계를 기준으로 테러의 역사를 돌아보면, 

테러리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 역사의 어긋난 첫단추 틈새에서 자라난 부산품이었다.


■ 1968~1978
포스트 식민주의 속에서 자생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들이 떠나면서 남겨두고 간 것은 테러의 씨앗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옛 영토는 서구 열강의 입맛에 따라 찢어졌고, 식민시대의 후유증 탓에 중동지역의 안정적인 현대국가 형성은 여전히 요원했다. 특히 영국의 이면 합의에 따라 세워진 이스라엘의 건국은 아랍과 이슬람 세계의 반서구주의 움직임을 가속화시켰다. 서방국가들이 만든 토대에 균열을 내고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정치적 목표 아래 이슬람 지하조직들이 결성됐다. 국제적 테러리즘의 첫 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1967년 이스라엘이 일으킨 6일전쟁에서 아랍 군대들이 대패하자 군사적으로 정면승부하려 해서는 이스라엘에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폭탄테러, 납치, 하이재킹 등의 도심테러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72년 뮌헨 올림픽 도중 벌어진 ‘검은 9월단’ 사건(사진)이다. 팔레스타인의 극좌파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은 올림픽 선수촌에 몰래 잠입해 이스라엘 선수들의 숙소를 습격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수 2명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11명을 인질로 잡은 후 이스라엘이 억류 중이던 팔레스타인인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뮌헨 공항에서 서독 경찰과 대치하던 이들이 결국 수류탄을 터뜨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사망했다. 이 비극적 사건은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테러의 공포가 처음으로 수억 세계 인구에게 각인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테러의 목표물은 주로 직접적인 분쟁 관계에 놓인 나라에 한해 특정인에 대한 암살, 혹은 제한된 숫자의 인질에 국한됐다.


■ 1979~1990
냉전의 후원으로 더욱 전문화


제한된 수준에 머물렀던 테러가 지금처럼 한 국가의 정규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게 된 첫 토대를 제공해 준 것은 바로 냉전이었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친소 정권을 세워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듦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소련이 탱크를 앞세워 아프가니스탄의 도시들을 점령해 나가자, 무자헤딘(아프간 게릴라 무장조직)의 격렬한 저항이 시작됐다. 이슬람 각국의 무슬림들도 아프간을 돕기 위해 국경을 넘어 전쟁에 참여했다. 소련판 베트남전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1989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진다.

당시 최강의 군사대국 중 하나였던 소련을 상대로 무자헤딘이 10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프간이 소련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미국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이슬람 대국이자 미국의 강력한 우방국 사우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 국방부 소련정보관이었던 찰리 윌슨은 2010년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무자헤딘이 소련군에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워주기 위해 미 중앙정보국(CIA) 비밀예산으로 몇 년에 걸쳐 수십억달러를 지원했으며, 스팅어 미사일 등 무기들을 계속 보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무자헤딘 중에는 후에 알카에다의 창시자가 된 오사마 빈라덴(사진)이 있었다. 빈라덴은 아프간 침공 소식을 듣고 자원해서 의용병으로 참전했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데다 사우디의 돈 많은 가문 출신인 빈라덴은 이 때만 해도 CIA가 가장 신뢰하는 무자헤딘 중 한 명이었고, 미국이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 주는 창구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슬람 무장단체들은 소련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미국과 유럽, 아랍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처음으로 중화기를 들고 전투를 치르는 경험을 쌓았다. 이때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테러는 단순한 암살이나 인질극 차원에서 벗어나 보다 전문화된 형태를 띠게 된다.


■ 1991~2004
포스트 냉전시대, 지역 넘어 세계화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체제가 종식됐지만, 서구 국가들이 소련의 대항마로 키워냈던 무자헤딘의 후예들은 ‘부메랑’이 되어 칼끝을 거꾸로 들이밀기 시작했다. 소련이 장악했던 지역은 권력 공백 상태에 놓였고, 테러조직들은 그 혼란을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미국과 소련, 양쪽 진영의 군비 경쟁으로 대폭 늘어났던 재래무기는 냉전이 끝난 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점점 테러단체들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소련이 물러난 발칸반도와 아프간은 테러조직의 온상이 됐다.

특히 1989년 소련이 철수한 후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 정부가 들어선 아프가니스탄은 각종 병참시설과 군사훈련 시설은 물론 여행 서류 위조까지 가능한 최고의 테러 기지가 됐다. 이집트의 이슬람 지하드 조직,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카슈미르 무장단체 등은 탈레반의 지원 아래 서로 긴밀히 협력하며 진화하기 시작했다.

소련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없어진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로 우뚝 서며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열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외교에 대한 불만과 함께 미국 문화가 이슬람 문화를 잠식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속에서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반미감정은 커져갔다. 그리고 2011년, 테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9·11 테러가 일어났다. 알카에다가 항공기를 납치해 동시다발 자살테러를 일으키면서 뉴욕의 110층짜리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국방부 건물이 공격을 받아 3000여명의 민간인들이 떼죽음을 당한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뉴욕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고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대사관이 공격을 받아 수백명이 죽은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긴 했지만, 9·11 테러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존 무어는 9·11 사건은 “테러의 세계화를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넘어 미국의 본토를 직접 겨냥한 데다, 특정 요인의 암살이 아닌 대규모 민간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테러와 차별성을 보였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는 이를 “21세기 첫 전쟁”으로 규정했다. 빈라덴이 숨어 있는 아프간에 지상군을 전격 투입하고, ‘무한 정의 작전’이란 이름을 붙인 보복 전쟁에 돌입했다. 알카에다 훈련 캠프와 탈레반 정부의 군사시설에 미사일과 폭격을 가했다.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미국은 과도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이후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출범시키는 등 중동 전쟁의 전선을 계속 확대해나갔다. 그리고 계속된 추적작전 끝에 2011년 파키스탄의 은신처에 숨어 있던 빈라덴을 사살하는 데 성공한다.

IS를 상징하는 깃발.


■ 2005~현재
‘아랍의 봄’ 이후 더 잔인해지고 분권화


전 CIA 요원인 마크 세이지먼은 ‘테러와의 전쟁’ 후 “알카에다는 이제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과 탈레반은 무너졌을지언정, ‘테러와의 전쟁’은 성공하지 못했다. 오사마 빈라덴을 중심으로 한 알카에다 지도부의 영향력은 미국의 공격으로 쇠퇴했을지 몰라도 알카에다의 활동과 정신을 계승한 ‘알카이디즘(al Qaidism)’은 더욱 강력해진 반미감정을 중심으로 세계 각 지역의 이슬람 토착세력과 결합해 오히려 새로운 테러의 전성기를 열었다. 

미 싱크탱크 랜드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걸프전이 벌어진 해였던 1991년 불과 7개였던 이슬람 살라피 계열 테러조직의 숫자는 9·11 테러가 일어난 2001년 20개로 늘어났고, 2013년에는 그 두 배가 넘는 49개로 늘어났다. 지하디스트들의 규모도 7년 전에는 1만8000~4만2000명으로 추산됐지만, 2013년에는 최소 4만4000명에서 최대 10만5000명까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 독재정권들이 무너지면서 권력 공백이 생기고 시리아 내전 등이 발발하면서 지하디스트들의 숫자는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테러 공격의 횟수도 크게 늘어났다. 2007년 100건 정도에 불과했던 알카에다 및 그 연계조직들의 테러 횟수는 2013년 900건 이상으로 9배 이상 늘어났다. 눈에 띄는 것은 IS의 약진이다. 2012년까지만 하더라도 케냐 쇼핑몰 테러사건을 일으켰던 소말리아의 알샤바브가 일으킨 테러가 전체의 46%를 차지했지만 2013년에는 IS가 43%로 알샤바브(25%)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알카에다 지도부 영향력의 쇠퇴로 알카에다 계열 조직들의 분권화는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원래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부인 알누스라전선에 속해 있던 IS가 알카에다 지도부의 지시를 듣지 않아 제명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알카에다는 IS가 지나치게 잔인하고 폭력적이라며 반대했다. 알카에다 역시 2003년 김선일씨 참수 동영상을 배포하는 등 한때 외국인 인질들을 참수하는 전술을 쓴 적이 있지만, 곧 이를 포기했다. 지나치게 잔혹한 테러 수법은 오히려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대중적인 지지와 멀어지는 역효과가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알카에다 지도부 중심의 수직적 상명하달 구조가 먹히지 않을 만큼 테러 생태계가 분권화되면서 IS는 거꾸로 알카에다의 명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IS는 참수라는 야만적인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효과적으로 세련되게 활용해 젊은 자원병들을 대거 모집하는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예전과 달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영국·호주·프랑스 국적의 지하디스트들이 대거 참전을 지원하고, SNS상의 프로파간다 역시 영어로 제작하는 등 이제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단순히 지역 내 무슬림이 아니라 서구 문화권의 무슬림까지 직접 겨냥해 흡수하고 있다.

알자지라는 “이들에게 테러로 죽인 사람의 숫자가 몇 명이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면서 “테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신규 자원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하느냐가 자신들 활동의 평가 잣대”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슬람 무장단체들 내에서도 참수라는 방식에 대한 의견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며 “(옛 알카에다 지도부처럼) 참수라는 야만적인 방식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쪽은 따라하지 않겠지만, 참수 동영상 충격요법이 새로운 자원병을 모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한 IS 같은 단체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