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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뒤늦은 부고

칼럼

by 정소군 2022. 8. 1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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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미얀마는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랑군대학(지금의 양곤대) 물리학과 3학년이던 코 지미가 그녀를 처음 본 곳도 8888항쟁 시위 현장이었다.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몰려오는 군인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발차기를 하며 싸우고 있었다. 훗날 그는 그 인상적인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아볼 새도 없이 곧 학생 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감옥에 끌려간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악명 높은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된 지미는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풀어낼 길 없는 그의 증오는 간수들을 향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가혹한 매질이었고, 그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를 ‘마음의 지옥’에서 꺼내준 것은 우연히 같은 방에 수감된 스님에게서 배운 ‘명상’이었다. 그 엄혹한 곳에서 그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그런 것뿐이었다. 그는 명상을 통해 겨우 평정심을 되찾고 난 후에야 간수들을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군부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할지언정 그들도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라고.

 

시민활동가 초 민 유. AP연합뉴스

 

하루하루 버티다보니 어느덧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인세인 교도소에 한 여성 수감자가 새로 들어왔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위를 조직한 혐의였다. 그는 한밤중 자신의 방까지 들려오는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간수의 도움으로 종이와 펜을 얻은 그는 여성 수감자에게 안부를 묻는 쪽지를 보냈다. 여성은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밤마다 독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그녀에게 더 많은 쪽지를 보냈다. 그렇게 펜팔이 시작됐다.

간수가 눈감아준 덕분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 이들은 각자 좋아하는 정치사상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구상을 공유했다. 이 여성의 이름은 닐라르 테인. 알고보니 발차기를 하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2005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들은 이듬해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첫 만남 후 18년이 흐른 뒤였다. 19살 청년은 이미 37살 중년이 돼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18년도 모자랐던 것일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7년 군부 정권이 예고 없이 연료 가격을 최대 500% 올렸다. 거리는 다시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인파로 가득 찼다. ‘샤프론 혁명’의 시작이었다. 지미와 테인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시위의 중심에 섰다. 군부는 시위를 조직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넣기 시작했다. 지미가 먼저 잡혀갔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예쁜 딸을 뒤로한 채.

 

짧았던 신혼의 행복을 포기하고 2년 만에 다시 수감된 감옥 안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창문 없는 독방 감옥은 그에게 ‘제2의 집’이었다. 이번에 그가 갇힌 곳은 고향 샨주에 있는 타웅기 교도소였다. 인레 호수의 수위가 높아질 때면 희미하게 들려오는 모터보트의 엔진 소리만이 바깥세상을 느끼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끈이었다. 그는 인레 호수를 배경으로 정치적 의무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견디기 힘든 수감 생활을 버텨냈다.

그렇게 5년을 더 감옥에서 보낸 끝에 그는 비로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풀려난 2012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민족동맹(NLD)이 합법화됐고, NLD 2015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그가 인생의 절반인 22년을 희생한 끝에 얻어낸 결실이다. 다만 2017년 군부가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를 학살할 때 그와 테인을 비롯한 88세대가 침묵한 것은 오점으로 남는다.

 

결국 로힝야에게 들이댔던 군부의 총부리는 지난해 2월 미얀마 민중을 향했다. 시대가 다시 그를 필요로 했다. 그는 이번에도 그 부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도피 생활을 하며 시민 불복종 운동을 이끌던 그는 지난해 10월 안가를 급습한 군부에 체포돼 그 지긋지긋한 인세인 교도소로 또다시 끌려갔다. 그리고 세 번째 들어간 교도소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다. ‘지미’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했던 초 민 유는 지난달 25일 민주화 운동가 3명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53세.

그는 항상 딸을 ‘선샤인’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딸이 살게 될 세상은 자유로운 미얀마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그 세상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현재 미얀마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구금 중인 사람은 117명에 달한다.

 

<참고자료 : 미얀마타임스·이라와디·이코노미스트·워싱턴포스트·프런티어미얀마>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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